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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오오토모 소린, 무지카 건설에 착수하다

일본 전국시대;

오오토모 소린, 무지카 건설에 착수하다



 덴쇼 6년(1578년) 오오토모 소린이 3만 5천의 대군을 인솔하고, 휴우가(日向) 나우시카(無鹿)에 진을쳤습니다.



 휴우가 중앙에 일대 세력을 쌓아 올리고 있던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시마즈의 공격을 당해 본거지인 사도하라성(佐土原城)에서 쫓겨나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에게 도망친 것은 덴쇼 5년(1577년)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둘은 결혼으로 인한 친척관계이기에 소린은 요시스케를 도우려 합니다. 하지만 가신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순조롭게 영토를 넓혀 이미 큐슈에까지 세력을 펼치고 있는 츄고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 히젠의 곰 류조지 다카노부등이 있었기에 소린이 남쪽을 향해 출진하면, 그들에게 배후를 위협해질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린의 결의는 단단했습니다. 요시스케는 휴우가를 탈환할 수 있으면 그 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프란시스코 자비엘을 만난 이래, 깊게 크리스트교를 믿던 소린은 그 휴우가의 땅에 이전부터 꿈꾸고 있던 크리스찬의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에 중요한 것은 크리스트교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남만 무역이었지요. 큐슈의 지도를 보면 분고에 외국선이 입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휴우가를 지나야 합니다. 여기가 적에 넘어가면, 배도 위험에 처해지는 일이 됩니다. 이 즈음의 남만 무역의 최대 중요품은 초석입니다. 대포나 총에 사용하는 화약은 이 초석과 유황 그리고 목탄을 혼합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유황과 목탄은 일본에서 손에 들어 오지만, 초석만은 전부 수입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종교적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로도 휴우가땅을 지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크리스천 영주, 오오토모 소린

 덴쇼 6년(1578년) 봄 요시스케의 아들 이토 스케다카(伊東義兵)을 길 안내로 해 소린의 아들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휴우가 북부의 츠치모치치 츠카시게(土持親成)와 싸우기 위해 출진합니다. 츠카시게는 이전에는 오오토모 산하의 무장이었지만 이토가가 시마즈가에 당한 기자키가하라(木崎原) 전투에서 그 영지를 가지고 시마즈가로 배신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츠카시게 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토가의 사람이 시마즈에 배신하고 있었습니다만, 오오토모의 참전을 알아 다시 술렁이기 시작하였지요. 요시무네가 이끄는 오오토모의 군세는 3만의 대군으로 일제히 후유가에 진입하였습니다.  요시무네는 금세 츠카시게가 있는 마츠오성(松尾城)을 함락시켜, 츠치모치치가는 멸망 했습니다. 



오오토모 소린의 배 모형


 이에 크리스도교 국가의 건설을 내외에 표명한 소린은, 크리스트교에 반대하는 부인과 이혼하고, 정식으로 세례를 받아 크리스찬이 된 뒤에 해로로 후유가로 향합니다. 그 배에는,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기를 내걸고 병사의 가슴에는 로사리오가 빛나는 유럽의 십자군을 연상시키는 진군이었다고 합니다. 덴쇼 6년(1578년) 여름 노베오카 부근에 상륙한 소린은 나우시카(無鹿)에 진을 치고, 이상 국가의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무지카는 음악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이지요. 교회에서는 비올라의 연주에 맞추어 찬송가를 노래했기 때문에, 여기서 연상된 이름일 지도 모릅니다. 농지의 개발과 함께, 신부나 수도사들의 숙소를 건설해 결국 분고와 같이 입원 설비가 갖추어진 병원이나 고아를 수용하는 시설도 있는 일대 복지 도시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 국가가 다 만들어 지기 전에 크게 사태가 변화합니다. 해로로 후유가  향한 소린과 함께 육로로 남하한 중신 타하라 쇼린(田原紹忍)이 인솔하는 2만의 군세가 있었습니다. 이 즈음해서 이 군세가 오오토모와 시마즈의 세력범위의 경계선인 미미가와(耳川)를 건넜습니다. 이것은 즉 시마즈로의 진공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안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당연히 임전 태세를 갖추지요. 그리고 오오토모와 시마즈의 명운이 걸린 미미가와 전투가 그 막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