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아마고가의 멸망, 2차 코우즈키성 공방전
덴쇼 6년(1578년) 모리군에 포위된 코우즈키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아마코 가쓰히사(尼子勝久)가 할복 해, 산인에 기반을 두었던 아마고가가 멸망 했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사사키 도우요(佐々木道誉)를 선조로 이즈모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아마고가는 에이로쿠9년(1556년)에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에 공격받아 멸망 해버립니다. 그러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은 굴하지 않습니다. 그는, 16세에 첫 출진 할 때에 다음과 같이 초생달에 맹새했다고 유명한 아마고 십용사 중 한 명입니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16세 초승달에 맹새하다
願わくば我に七難八苦を与えたまえ
원컨데 나에게 칠난팔고를 주기를
그는 마치 오뚜기와 같이 아마고가를 위해 일어납니다. 모리의 포로가 되었을 때도, 설사를 핑계로 초저녁부터 새벽녘에 걸쳐 170회나 화장실을 다녀와. 감시역이 방심하자 변소의 구멍으로 탈출하기 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런 사라노스케가 아마고가 멸망으로부터 2년 뒤의 에이로쿠 11년(1558년), 교토에서 승려가 되었던 아마고가의 자손을 환속시켜, 새로운 당주로 삼습니다. 그가 바로 아마고 최후의 당주, 아마고 가쓰히사입니다. 그들은 일국일성을 꿈꾸어 이즈모의 각지를 전전하면서 몇 번이나 전투에 참여합니다만, 한 번 멸망한 아마고씨의 옛 가신들만으로는 츄고쿠 지방 최강이 된 모우리와 겨룰 수 있을 리 없습니다.
덴쇼5년(1577년), 시카노스케는, 가쓰히사와 교토에 가서 오다 노부나가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당시, 천하 통일을 위해, 각지 평정이 한창이던 노부나가는 그들을 오다군의 츄고쿠 지방 평정을 담당하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산하로 해 코우즈키성을 지키도록 명합니다. 드디어 성을 받은 가쓰히사였지만, 곧 코우즈키성은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다음 해 덴쇼 6년(1578년) 봄, 가쓰히사는 히데요시의 협력 아래 총공격을 가해 다시 성을 빼앗아 코우즈키 성에 들어왔습니다. 빼앗긴 성에 또 다시 아마고 일족을 배치하는 것은, 모리를 도발하기 위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주요성 배치도
이 코우즈키성은, 오다에 있어서 대 모리의 최전선이지요. 원래 이즈모를 중심으로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명문의 아마고가의 부하인 모리가 아마고가를 배신해 츄고쿠 지방의 최강이 된 것이기 때문에, 아마고가에 있어서는 다년간의 원한을 풀고 싶은 상대가 모리이며, 모리가 보면 불쾌한 상대가 아마고가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모리는 곧바로 도발에 걸려 옵니다. 모리 측의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는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코우즈키성을 향해 3만이라고 하는 대군을 진군 시킵니다. 물론, 아마고가만으로는 도저히 3만의 대군을 상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다군에서도 원군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이 때, 히데요시는 하리마 미츠키성에소 농성 하는 벳쇼 나가하루를 포위하고 있었기에(미키성 농성전), 코우즈키성으로 향한 히데요시의 군세는 1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3만의 모우리군을 상대로 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코우즈키성에 전령을 보내, 가쓰히사 이하 아마고 일족에게 일단 성에서 탈출하라 재촉합니다. 하지만 가쓰히사, 사카노스케 등 아마고 일족에게 있어서 겨우 실현된 일국일성이니 그렇게 간단하게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 코우즈키성에의 원군의 파견을 신청합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오히려 성의 주변에 있는 하시바 히데요시 군의 철퇴를 명합니다. 당시 노부나가는 천하 통일을 위해 전투 중이었고, 적은 모리만이 아닙니다. 나가시노의 전투(나가시노성 공방전)에서 우수했다고 해도 아직 다케다는 건재하고, 호쿠리쿠에서는 잇코우잇키가 일어났지요. 노부나가는 태세를 정비하려한 것입니다.
하시바군의 철퇴에 의해서 코우즈키성은 버림받은 형태가 되어 버립니다. 성 안에 남는 사람은 수백명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식량이나 물도 다해 히데요시의 원군도 철퇴한 이상 이대로 농성을 계속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가쓰히사는 모리에 항복하겠다고 합니다. 모리가 낸 조건은 다름아닌 가쓰히사의 할복이었습니다. 모리는 그 조건만 받아들이면 그 외의 사람에게 일체 위해를 주지 않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6년(1578년) 여름 코우즈키 성에서 당주 아마코 가쓰히사 이하 수 명이 할복 하고 성문을 열었습니다. 사카노스케는 주군의 목을 가지고 모리군에 간 뒤, 그대로 포로가 됩니다. 사카노스케는 주군의 할복 때에, 아마고가를 재흥할 것을 약속하고 할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컨데 나에게 칠난팔고를 주기를
그러나, 그런 그의 결의는, 모리측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키에 보내지는 도중의 빗츄의 가도에 호송을 담당하고 있던 카와무라 아라타 사에몬(河村新左衛門)에게, 배후에서 칼을 맞아 쓰러집니다. 하지만 사카노스케는 칼을 맞은 채로 강으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 했습니다만, 후쿠오카 히코에몬(福岡彦右衛門)에 따라 잡혀 목을 베이고 말았습니다. 초승달이 그에게 약속한 칠난팔고, 그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보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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