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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와 이야에스가 맞붙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4) 고마키 대치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와 이야에스가 맞붙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4)

고마키 대치



 덴쇼 12년(1584년) 3월 28일,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출진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코마키산성의 북동쪽의 가쿠텐성(楽田城)에 진을 쳤습니다. 




 덴쇼 12년(1584년) 3월 13일, 히데요시 산하의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의 이누야마성 공략(이누야마성 공방전)으로 시작된 이 전투는 노부오와 연합한 도쿠가와와 기나이를 지배하는 히데요시의 전투는 이기는 쪽이 천하를 노리게 될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시 무장들도 이 사실을 알기에 도쿠가와에 붙을 것인가 히데요시에 붙을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차녀 도쿠히메(督姫)를 신부로 주어 동맹을 맺고 있던 관동의 호조 우지나오로(北条氏直)의 원군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기슈의 네고로중 이나 사이가중과는 동맹을 맺어, 기나이에서 게릴라전에 골치를 썩히던 히데요시는, 전투의 발발 후에도 오사카성에서 쉽사리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구로에서 패전(하구로 전투) 뒤에 히데요시 스스로 3만의 군세를 이끌고 진군합니다. 


 히데요시의 후방을 노리는 사이가와 네고로중은 키시와다성과 사카이를 공격했지만, 키시와다성은 나카무라 이치우지(中村一氏)이 분전에 의해 격퇴당했습니다. (키시와다성 공방전) 하지만 사카이는 공격당하고, 그들은 오사카성 근처까지 쳐들어가서 성에 있는 여성들을 오미 사카모토까지 피신시킵니다. 이 성의 방비를 맡는 것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라고 하는 명장 이어서 네고로와 사이고중의 공세를 잘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한편, 오미를 경유하고 미노에 들어온 히데요시는 27일에 이누야마성에 도착하여 도착 후 곧바로 주위를 시찰하는 것과 동시에 전황을 파악해, 28일부터 코마키산성의 약 2 km의 북동쪽의 가쿠텐성에 포진 했습니다. 


당시 많은 성채(사이)가 쌓아졌습니다


 노부오도 다음날인 29일에 이세 나가시마로부터 코마키산으로 이동해, 이에야스와 합류했습니다. 여기에, 히데요시군 8만과 이에야스, 노부오군 1만 6천은 얼마안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 일촉즉발의 상태인 채로 대치하게 됩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도착하기 전 망루와 목책등의 방어 시설물 구축을 실시해 완벽한 수비를 굳히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도 도착과 동시에 여러 방어 시설을 건설했기에, 큰 전투는 없고 작은 전투만이 반복되어서 이를 '코마키 대치'라고 부릅니다. 대치하면서 딱히 할게 없는 양군은 서로에 대해 소리 높여 비방하고 욕설을 하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격문을 쓰는 야스마사



 도쿠가와 사천왕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는 그의 격문에서 '히데요시는 야인의 아이로, 말을 끄는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노부나가의 은혜로 출세해 한 사람의 무장이 될 수 있었는데, 노부나가가 죽자 마자 그 은혜를 잊고 국가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도리에 어긋난 남자이다'라고 했습니다. 도쿠가와군은 이를 주위에 뿌렸다고 합니다. 이에 대항해 히데요시는 '이거나 먹어라!'며 엉덩이를 두드리며 도발했다는 이야기도「오오미카와시(大三川志)」나 「쇼우잔기담(常山紀談)」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측은 대치하고 있었지만, 지방의 영주들은 어느측에 붙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엇습니다. 시나노에서는 히데요시측의 기소 요시마사(木曽義昌), 우에스기 가게카쓰, 이에야스측의 호시나 마사나오(保科正直), 오가사와라 사다요시(小笠原貞慶)가 있었습니다. 관동에서는 히데요시측으로 사다케 요시시게(佐竹義重)가, 이에야스측에는 그의 사위인 호조 우지나오가 있었습니다. 시코쿠에서는 센고쿠 히사시데(仙石久秀)가 히데요시의 편이고 반대로 쵸쇼카베 모토치카는 이야에스의 편이었지요. 그리고 히데요시의 친구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와 이야에스를 지지한 삿사나리사마(佐々成政)의 사이에 스에노모리성의 공방전도 펼쳐집있습니다.  


 이러한 대치상태에서, 하구로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모리 나가요시의 움직임은, 다음에 전투가 있을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