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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시즈가타케 전투(2) 사쿠마 모리마사, 하시바군을 기습하다

일본 전국시대;

시즈가타케 전투(2) 

사쿠마 모리마사, 하시바군을 기습하다



 덴쇼 11년(1583년), 비와호의 북동쪽 기슭에서, 1개월에 걸쳐 대치하고 있던 시바타 가쓰이에군과 하시바 히데요시군사이에, 히데요시의 부재중을 확인한 가쓰이에가 사쿠마 모리마사를 시켜 히데요시의 성채를 급습하여 시즈가타케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혼노지에 쓰러진 오다 노부나가 사후(혼노지의 변) 미쓰히데와의 야마자키 전투(야마자키 전투)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넘어뜨린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다의 계승자를 결정하는 키요스 회의(키요스 회의)에서 노부나가의 장손 산포시를 추천하고 스스로 후견인이 되어 노부나가의 장례까지 본인이 맡습니다. 이에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삼남 코베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하고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를 아내로 맞이해 히데요시에 대항합니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해 에츠젠에서 움직일 수 없음을 간파한 히데요시가 반대세력을 짖누르는 도중, 봄이 찾아오자 가쓰이에는 히데요시를 토벌하러 나섭니다.(시즈가타케 전투(1)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후방을 시끄럽게 하자, 히데요시는 당장 충돌이 없는 시즈가타케를 떠나 기후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게 된 가쓰이에는 히데요시군의 영역인 오이와산(大岩山)과 이와사키산(岩崎山)의 방어가 허술한 일을 알게된 모리마사는 이근방의 성채들에 기습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상대의 품에 깊게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철퇴 시기를 잘못하면 주위에 산재하는 성채의 응원 부대에 둘러싸여 버리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쓰이에는 목적의 성채를 떨어뜨리면 신속하게 철퇴하는 일을 조건으로 모리마사의 기습 작전을 채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11년(1583년) 후와 카쯔미쯔(不破勝光) 등이 선봉으로 모리마사 본대는 약 8,000의 군사를 이끌고 교우이치산(行市山) 성채를 출발합니다. 한편 가쓰이에는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토시나가(利長) 부자를 다른 벳쇼산(別所山)에서 모산(茂山)으로 이동시켜 모리마사의 배후를 담당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도 키츠네즈카(狐塚)까지 본대를 전진시킵니다. 게다가 시바타 카쓰마사(柴田勝政: 모리마사의 남동생으로 가쓰이에의 양자)가 한노우라(飯浦)깍아 낸 길에 진을 쳐 모리마사를 원호합니다. 적이 허술하게 방어하는 요고호의 서쪽으로 나아간 모리마사는 밤이 지나 서서히 아침이 되는 무렵 일제히 오이와산 성채에 맹공을 걸었습니다.



시즈카타케 전투, 모리마사의 기습



 여기를 지키는 히데요시의 무장은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 불과 1,000 명 정도만 있어 수세에 몰리면서도 여러번 상대를 물리쳐 견디지만, 결국은 8배의 적을 이기지 못해 성채는 함락 당하고 키요히데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근처의 오이와산이 함락당한 일을 안 이와사키산 성채의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은 신속하게 성채를 탈출해 키노모토 방면이라고 철퇴합니다. 이것을 들은 시즈가타케 성채를 지키는 쿠와야마 시게하루(桑山重晴)도 일단은 철퇴를 하려고 하지만 배후에 있던 니와 나가히데가 원호를 와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 즈음 정확히 해가 떴기 때문에 적측의 반격을 염려하는 가쓰이에는 모리마사에게 일단 철퇴하는 일을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기세 등등한 모리마사는 이 명령을 듣지 못한 채로 오이와산 성채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이튿날 아침에 바로 시즈가타케 성채를 공략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실은 이 때, 기후성을 향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나가라가와(長良川)의 수량이 늘어나 있어 진군하지 못하고 오카이(大垣)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13리(약 52 km)의 거리를, 불과 5시간에 돌아와 버립니다. 혼노지 뒤의 츄고쿠대귀환(츄코쿠 대귀환 )을 방불케 하는 속도 였지요. 이를 '미노 대귀환'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전세는 또한번 바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