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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키요스 회의로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다

일본 전국시대;

키요스 회의로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다



 덴쇼 10년(1582년) 6월 27일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결정하는 키요스 회의에서 장손 산포시(三法師)가 상속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것이 덴쇼 10년(1582년) 6월 2일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주군의 죽음을 복수하려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야마자키의 전투(야마자키 전투)에서 무찌른 것이 6월 13일의 일이었습니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뒤를 잇게한 장남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와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에 오다군은 시급히 주군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키요스 회의가 열립니다.



키요스 회의를 다룬 책 표지



 이 회의를 소집한 것은 오다가의 필두 가로인 시바타 가쓰이에였습니다. 그리고 회의에 출석한 인물은 오다가의 중신인 니와 나가히데, 노부나가와 같은 유모에게서 젖을 먹으며 큰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그리고 히데요시의 네 명이었습니다. 원래 이자리에는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있어야 했지만, 혼노지에서의 급변을 알아 상경하려고 한 것을 호조 우지마사 부자가 방해한 간나가와 전투(간나가와 전투)로 패배해 영지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투에세 패배한 것으로 지위가 내려가 회의에 불리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오다가 가계도


이 때 후계자 후보로 주목받고 있던 인물은 차남 오다 노부오(織田信雄)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이었습니다. 노부오는 무장으로서는 공훈이 별로 없었습니다.  한편, 노부타카는 혼노지의 직전에 노부나가가 시코쿠의 평정을 명할 정도이고, 그 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함께 아버지가 원수를 갚고 있는 맹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쓰이에는 노부타카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전혀 예상외의 인물을 추천합니다.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장남 노부타다의 장남 즉, 노부나가의 손자인 산포시입니다. 노부나가의 직계이고 이미 당주가 되었던 노부타다의 장남이기 때문에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지닌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3살인 어린아이였지요. 그래서 논의 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후계자는 산포시님이오!"


 회의는 가쓰이에가 지지하는 노부타카와 히데요시가 지지하는 산포시의 구도가 됩니다. 하지만 노부타카는 이미 간베(神戸)의 양자가 되어서 간베 노부타카라 자칭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에서 밀리는 것이 사실이지요. 원래대로라면 가쓰이에가 지지하는 노부타카가 후계가 되었겠지만, 일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주군의 원수를 갚은 것은 히데요시 이기에 히데요시의 영향력은 어느새 가쓰이에의 영향력을 아득하게 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히데요시가 사전에 이야기 해서 이케다 쓰네오키와 니와 나가히데를 포섭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나가히데가 '야마자키 전투에서 주군의 복수를 갚은 것은 하시바님 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결국 산포시가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산포시의 후견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영지의 배분도 히데요시 주도로 행해집니다. 


노부오는 오와리 

노부타카는 미노

산포시는 아즈치성 

가쓰이에는 에치젠, 나가하마

나가히데는 와카사, 오미의 2군 

쓰네오키는 셋츠의 3군 

히데요시는 야마시로, 탄바(교토), 카와치

그리고 가즈마사는 오히려 직위를 박탈당했습니다.  



가쓰이에와의 갈등은 곧 폭팔합니다



누가 봐도 제일 좋은 곳은 모두 히데요시가 가져가고 있습니다. 또한, 가쓰이에가 받은 에츠젠은 원래 노부나가가 주었던 영지였습니다. 새로생긴 나가하마는 원래 히데요시의 영지, 히데요시는 오다는 가로에게 자신의 영지를 주고 오다 영지의 알맹이를 뽑아 먹은 것이지요. 아마 가쓰이에에게는 엄청난 충격일 것입니다. 그는 새로 받은 영지인 나가하마가 교토에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거점을 에츠젠에서 옮기지 않지요. 후계에서 밀린 노부타카도 엄청난 불만을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이에 야마자키 전투가 있던 덴노산에 성을 쌓습니다. 이에 가쓰이에는 '누구를 방비하려 성을 구축하는가?'라고 불쾌감을 표현햇다고 합니다. 아무튼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에 거점을 옮길 때까지 히데요시는 이 덴노야마성(야마자키 성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머무르게 됩니다. 가쓰이에의 불만은 결국 불과 일년 후 시즈가타케 전투로 폭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