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호조 소운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관동의 패자, 후 호조 가문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갑작스런 출세'를 온 몸으로 체현한 가문이 둘 있으니, 바로 사이토 가문(사이토 가문)과 후 호조 가문입니다. 호조 가문의 성립, 호조 소운의 활약 사실 일본사에서 호조 가문은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전기의 호조 가문은 덴노와 권력투쟁을 했을 정도로 강성한 힘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이와 구별하기 위해 전국시대의 호조가문은 전기의 호조가문과 비교하기 위해 '후호조 가문' 이라고 부릅니다. 호조 가문을 일으킨 것은 이세 신쿠로 나가우지(伊勢新九郎長氏)로, 후에 '호조 소운'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그는 생전에는 스스로를 '호조 소운'이라고 자칭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 호조 소운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소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전국시대의 평균수명과 장수한 무장들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전국시대의 평균수명과 장수한 무장들 전국시대의 평균수명은 35세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의료시설과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짧은 수명을 가졌는데, 여기에 전란이 거듭되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40~50세 사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장수하는 무장들이 있었습니다. 장수한 나이별로 등수를 매겨 보았습니다. 1위 호조 겐안(北条幻庵) 97세의 장수를 자랑한 무장입니다. 호조 소운의 아이로서 탄생해, 호조의 5대 우지나오(氏直)의 시대까지 살았습니다. 그 생애는 가히 호조가의 발호와 멸망을 지켜본 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위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 93세의 장수를 자랑한 류조지 이에카네는 쇼니가와 분쟁하며 류조지가의 재흥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묘오의 대지진으로 호조 소운이 전면에 등장 일본 전국시대;묘오의 대지진으로 호조 소운이 전면에 등장 묘오7년(1498년) 8월 25일, 토카이도해(東海道)에 추정 매그니튜드 8. 3의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묘오 7년 지진으로 인해 쿠마노모토궁(熊野本宮)의 신전이나, 나치(那智)의 방사가 파괴되었습니다. 후에, 묘오 지진으로 불리는 대지진입니다. 이 지진에 의한 해일도 매우커서 가마쿠라 대불을 납입하고 있던 대불전이 해일로 파괴되어 이후 가마쿠라 대불은 지금처럼 밖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 지진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 대지진에 의해서 입지를 굳힌 전국 무장이 있습니다. 미증유의 재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사는 희망을 준 일로, 그 후에 큰 지지를 얻었다고 하는 미담이지요. 천년에 한 번일어날까 하는 재해에 휩쓸린 동북지방에서 민중의 입..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마쿠라, 쓰루카오카하치만궁 전투 일본 전국시대;가마쿠라, 쓰루카오카하치만궁 전투 다이에이6년(1526년), 오와(安房)의 전국 다이묘 사토미가가, 사가미의 후호조의 거점인 카마쿠라를 공격한 쓰루오카하치만궁 전투(鶴岡八幡宮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전국시대의 개막, 화려하게 그 무대에 뛰어 오른 사가미의 호조 소운. 그 소운에게서 배턴을 건네받은 2대째 호조 우지쓰나였지만 군웅할거, 하극상이 만연한 전국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이웃나라 오와의 사토미가와는, 항상 일촉즉발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다이에이5년(1525년)에는, 사토미가의 수군이 미우라 반도에 상륙 작전을 시도했습니다만, 후호조가의 분전에 의해 상륙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해, 사토미가는 다시 에도 만을 배로 넘고 미우라 반도에 쳐들어갑니다. 이 때의 사토미의 군세는 대소 수백..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 이라이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 이라이성 공방전 에이쇼 13년(1516년), 전국의 풍운아 호조 소운이 아라이성공방전을 마지막으로 사가미를 재패합니다. 사가미일대를 거의 손에 넣은 소운이지만, 아라이성을 거점으로 하는 미우라가에게 만은 아직 섣부르게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미우라씨의 당주는 미우라 요시아쓰였지요. 당시 80세를 넘은 소운은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미우라가를 목적으로 정합니다. 이윽고, 에이쇼 13년(1516년), 관동 관령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 도모오키(上杉朝興)가 아라이성을 구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해 이때를 기회라고 간파한 소운도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4년간이나 느긋하게 기다린 소운이었지만,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면 매우 민첩했지요. 조속히, 도모요시의 신.. 더보기
일본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의 시작, 오카자키성 전투 일본전국시대; 호조 소운의 사가미 재패의 시작, 오카자키성 전투 에이쇼9년(1512년), 호조 소운에게 사가미 오카자키성을 공격받은 미우라 요시아쓰가 스미요시성에 패주 했습니다. 소운은 바람처럼 등장해(이즈습격) 오다와라성도 손에 넣고(오다와라성 탈취) 호리코시쿠보도 멸하고, 이즈 일대의 지배를 강고한 것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공사를 보좌하는 역할 관동 관령직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양 우에스기가의 분쟁은 어느덧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구적의 코가쿠보와의 전투로 넘어가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는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나 그 부하인 소운을 의지하게 되어, 이윽고 에이쇼 원년(1504년) 쿠즈류가와 전투(쿠즈류가와 전투)가 있었지만, 승패는 불분명했지요. 하지만 확실해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관동의 정세가 움직이다, 타치강변 전투 일본 전국시대;관동의 정세가 움직이다, 타치강변 전투 에이쇼 원년(1504년),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와 호조 소운이 동맹해, 대립하고 있던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와 타치강변(立河原)에서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을 기반으로 하는 무가 정권이면서, 교토에 정무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동 지배를 위한 특별한 직무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마쿠라쿠보와 관동 관령입니다만, 그들은 차츰 교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게 되어 서서히 쇼군과 대립하게 됩니다. 쿠보의 보좌인 관동 관령은 우에스기가가 독점하고 있고, 관동의 힘이 커져감에 따라 그 세력도 커져갔습니다.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교대로 관동 관령을 맡게 됩니다만 권력은 독점하고 싶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호조소운의 오다와라성 탈취 일본 전국시대; 호조소운의 오다와라성 탈취 묘오4년(1495년), 호조소운이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扇谷上杉)가의 중신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藤頼)가 지키는 오다와라성을 탈취했습니다.(년도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전국 3효융의 하나이고, 유일하게 5대, 100년에 걸쳐 군림한 호조가, 이 호조가가 대대로 본거지로 한 오다와라성은 원래 오우기가야즈 우에스기가의 성이었습니다. 사실 자세한 기록이 없기에 상세한 사항은 거의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엔토쿠워년(1491년), 혹은 묘오2년(1493년)에, '이즈습격'으로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차차마루를 추방하고 이즈를 손에 넣은 소운은, 관동 관령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 휘하에 있었습니다.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당주인 우에스기 사다마사는 오오타 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일본 전국시대;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엔토쿠(延徳) 3년(1491년) 또는 묘오(明応)2년(1493년),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아시카가 막부의 분가, 호리코시 쿠보(堀越公方)를 공격해, 멸망 시킨 싸움인 '이즈 습격'이 있었습니다. 분가라고는 해도 막부가 지방의한 무장에 멸해졌다는 이 이즈 습격을 전국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습니다. 엔토쿠 원년, 초대의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가 병사합니다. 그에게는, 적자 차차마루(茶々丸)와 측실 엔토쿠인(円徳院)이 낳은 쥰도우지(潤童子)라고 하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차마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양아치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흉포했기 때문에, 미치광이들을 가두어 두는 방과 같은 곳에 가두어 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