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코바야카와 다카카게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츠네야마성, 여성들이 죽창을 들고 분전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츠네야마성, 여성들이 죽창을 들고 분전하다 덴쇼 3년(1575년), 모리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우에노 다카노리(上野隆徳)가 지키는 비젠 츠네야마 성(備前常山城)를 점령했습니다. 반 오부나가 포위망에도 굴하지 않고 세를 불리는 노부나가는 계속해서 하나 하나 세력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아자이와 아사쿠라는 멸망하고 그 두개골이 술잔이 되고 말았지요. 노부나가의 세력이 서쪽으로 향할 때, 지금까지 전국 다이묘 모리의 지배를 받아 온 여러 무장들은 도대체 어느 쪽으로 붙을 지가, 당시 관서의 세력들의 가장 큰 관심아 였습니다. 이즈음에, 하리마의 소영주 코데라(小寺)가의 가신이었던 쿠로다 죠수이(黒田如水)가, 주군 코데라 마사모토(小寺政職)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다의 신하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에이로쿠6년(1563년) 모리 모토나리가,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아마고가의 이즈모(出雲) 하쿠로쿠성(白鹿城)에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와미 은광을 탈취한 모토나리는(이와미 은광 쟁탈전) 드디어, 아마고가의 이츠모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엔로쿠5년(1562년)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삼남 고바야카 다카카게와 함께 총원 1만 5,000의 군사를 인솔한 모토나리는 이와미를 경유해 이즈모로 들어옵니다. 이 행동만으로 많은 이즈모의 쿠니진들이 시원스럽레 아마고를 단념해 모리의 산하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아라와이(洗合)에 도착한 모토나리는 츠케시로을 구축합니다. 동시에 아마고의 본거지 갓산토다성을 견제하기 위해, 거기에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모토나리와 오오토모 소린의 대결, 모지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모토나리와 오오토모 소린의 대결, 모지성 공방전 에이로쿠4년(1561년) 모리 모토나리가 오오토모 소린의 공격을 받고 있던 모지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파견했습니다. 전국 3대 기습전의 하나라고 하는 이쓰쿠시마 전투로 스에 하루카타를 넘어뜨려 젊은 당주 오오우치 요시나가를 할복시키고, 츄고쿠 지방의 명문 오오우치씨를 멸망시킨 아키의 전국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는 이제 시선을 아키 밖으로 돌립니다. 오오우치가와 패권을 다투고 있던, 아마고가도 이때 약체화하기 시작합니다.(아마고의 몰락) 그런 가운데 큐슈의 입구 모지에 있는 모지성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오오우치가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오우치가가 멸망 해(오오우치 멸망), 오오토모 소린이 맡을 뻔한 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기타편; 전국시대의 미남, 미녀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1) 미남의 기준 일본 전국시대 기타편;전국시대의 미남, 미녀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1) 미남의 기준 전국시대에는 다양한 무장들이 난립하는 전란의 시대였지만, 그래도 현재와 비슷하게 미남, 미녀가 선호되었었습니다. 먼저 미남의 기준을 살펴보겠습니다. 미남의 기준은 키가 크고, 살쪘으며, 머리카락이 풍성할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조건을 가진 미남들은 누가 있을까요? 유명 무장들 중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미녀를 보고 싶으면 옆의 링크를 눌러 주세요.(전국시대의 미녀) 오다 노부나가 청년의 무렵에 여자로 잘못 보았을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당히 잔혹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 노부나가가 꽃미남이었다니 충격적입니다. 특별히 젊었을 때 초상화를 준비해 봤습니다. 여자 같나요? 오다 히데타카(織田秀孝) 노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모리의 대군을 눈앞에 두고 당당했던, 츠루히메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모리의 대군을 눈앞에 두고 당당했던, 츠루히메 츠루히메(鶴姫)는 우에노성 성주 우에노 타카노리(上野高 徳)의 정실입니다. 덴쇼 3년(1575년), 모리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우에노 다카노리(上野隆徳)가 지키는 비젠 츠네야마 성(備前常山城)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우에노 다카노리의 주군인 미무라 모토치카(三村元親)는 오다 노부나가의 꾀임에 넘어가 모리가를 배반했지요. 이에 모리의 대군이 모토치카를 넘어뜨리고, 이번에는 다카노리를 향해 갑니다. 마츠야마성이 점령될 무렵에는 이미 츠네야마성도 풍전 등화의 상태였습니다. 마츠야마성 점령 한 달 후에 대군에 포위되어 패배를 직감한 우에노 다카노리는 일족을 모아 마지막 주연을 열고, 일동에게 할복의 의지를 고했습니다. 그러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모리부부에 이은 잉꼬부부, 토이타노 오오가타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모리부부에 이은 잉꼬부부, 토이타노 오오가타 토이타노 오오가타(問田大方)는 코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의 정실입니다. 코바야카와가의 본가 누마카와가의 당주인 코바야카와 마사하라(小早川正平)의 딸입니다. 마사히라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전사했기 때문에 그녀의 오라버니인 시게히라(繁平)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게히라는 어린데다 병약했기 때문에 오오우치 요시타카와 모리 모토나리에 아마고의 침공이 시작될 때 이를 막는 것은 코바야카와의 어린 당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아마고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텐몬 19년(1550년)에 구금되고 강제적으로 은거하고 출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리 모토나리의 아들 다카카게가 코바야카와가를 잇게 됩니다. 이에 토이타노 오오가타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츄고쿠의 국모, 묘쿄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츄고쿠의 국모, 묘쿄 묘쿄(妙玖)는 츄고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의 정실입니다. 딱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름이 특이한 데요, 법명이기 때문입니다. 본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킷카와 쿠니쯔네(吉川国経)의 딸입니다. 묘오 8년(1499년) 아키국 쿠니진 킷카와 쿠니쯔네의 딸로 오구라산성 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한 후 아키국의 유력 쿠니진 모리가의 일족인 모리 모토나리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언제 결혼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아무튼 모토나리와 묘쿄는 매우 사이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력 다이묘 또는 쿠니진이라면 측실, 첩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모토나리는 묘쿄 이외의 처첩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토나리가 자식들을 걱정하면서 썼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의 츄코쿠 대귀환 타카마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의 츄코쿠 대귀환타카마츠성 공방전 덴쇼 10년(1582년) 츄고쿠 지방의 공략을 진행시키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빗츄 타카마츠성을 공격했습니다.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는 덴쇼10년(1582년) 가이의 다케다를 멸망 시켜(다케다가 멸망하다), 드디어 남는 강적은 츄고쿠 지방뿐이었습니다. 츄고쿠 지방의 평정을 맡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쇼 8년(1580년)에 하리마, 미츠키성을(미키성 농성전), 다음 9년(1581년)에 돗토리성(돗토리성 점령)을 점령해 드디어 덴쇼 10년(1582년) 빗츄까지 진군합니다. 도중에 비젠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아군에 되어(2차 코우즈키성 공방전) 사기 충전한 히데요시군은 타카마츠성(高松城)을 목적으로 정해 덴쇼10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