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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와카사국 타라노쇼우 잇키 발발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와카사국 타라노쇼우 잇키 발발 겐무 원년(1334년) 8월 21일, 와카사국 타라노쇼우(太良荘)에서, 백성 59명이, 지도우(地頭) 대관의 교대를 요구해 서약문을 제출하고, 잇키를 일으켰습니다. '우는 아니도 지도우에는 그친다'라고 할 정도로 가마쿠라 시대때부터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답에 이런저런이유를 붙여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거나 용수를 이용하려면 지불을 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럴때 농민들은 로쿠하라탄다이에 호소하고 있었습니다만, 로쿠하라탄다이가 멸망하고 나서는 더욱 치안이 나빠져 약탈행위가 공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와키부쿠로(脇袋)라는 지도우가 새로 부임했지만, 그는 장원내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리며 자신의 집을 짓는 등의 학정을 거듭해 겐무원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정토진종의 전파자, 혼간지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정토진종의 전파자, 혼간지 가문 일본 전국시대에 독특한 것 중 하나가 농민들의 봉기로 일어나서 만들어진 종교 국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농민 봉기는 주로 '잇코슈(일향종)'이라는 종교를 믿는 농민들이 일으켜 '잇코 잇키'라고 부릅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잇키 세력을 '직접 민주주의가 실시된 자치국'이라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혼간지 가문이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잇코슈의 일종인 정토진종을 믿었습니다. 정토진종의 창시 잇코슈를 전파하는 절을 혼간지라고 합니다. 오오타니 묘당(大谷廟堂)을 맡는유수직(留守職)을 제수받은 카쿠뇨(覚如)가 이 묘당을 사원화해서 혼간지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카쿠뇨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 오오타니 혼간지를 맡아 정토진종 전파에 힘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부나가 천하재패의 제일의 장애물, 나가시마 잇코우잇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노부나가 천하재패의 제일의 장애물, 나가시마 잇코우잇키 겐키2년(1571년)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대항한 나가시마 잇코우잇키에 대해 공격을 시작 했습니다. 이시야마 전투가 발발해 이시야마혼간지와 노부나가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켄뇨의 격문은 이세의 나가시마의 원증절의 조금도 종문도에게도 닿습니다. 이세 나가시마(長島)는 기소가와, 나가라가와, 이비가와라고 하는 3개의 강이 합류해 이세만에 유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강이 삼각지를 고리와 같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와쥬우(輪中) 지대로 불렸습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함께 치수공사를 해서 서로간의 협력 체제가 강고하고, 지역의 결집이 단단했습니다, 그들을 한군데 묶는 것이 바로 간쇼지(願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도쿠카와 이야에스의 미카와 잇코우잇키 진압 일본 전국시대; 도쿠카와 이야에스의 미카와 잇코우잇키 진압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 잇코우 잇키에 참가하고 있던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가 이에야스 측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잇코우 잇키를 평정하려 나섭니다. 미카와 잇코우 잇키라고 하는 것은, 당시 , 조동종(曹洞宗)의 세력이 강했던 미카와 동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혼쇼지(本證寺)의 소라세이(空誓)를 중심으로 영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저항한 약 반년간의 잇코우잇키입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에노미야지(上宮寺)의 경내에 토쿠가와의 분사를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과(이 설이 정설입니다) 혼쇼지에 도망친 건달을 도쿠가와의 가신이 허락을 받지 않고 포획 했기 때문에이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아무튼 도쿠가와측..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노익장,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토벌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노익장,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토벌 코우지 원년(1555년) 아사쿠라 소테키가 카가 잇코우잇키를 다카오산(高尾山)에 꾀어내 격파했습니다. 아사쿠라 소테키(朝倉宗滴)는 에츠젠의 아사쿠라가의 제7대 당주 아사쿠라 타카카게의 막내로 태어나 그의 손자인 제9대 당주 아사쿠라 사다카게를 숙부로 지지해 아사쿠라가를 전성기로 이끈 무장입니다. 그는 79세까지 장수한 무장입니다. 장수한 무장의 대부분이 만년은 후대에 양보하거나 은거하거나 취미생활에 매진해 전투에서는 멀어지는것이 많은 가운데, 이 소테키는 일생동안 전장을 현역으로 달린 사람입니다. 소테키는 그 생애 중에서 12회의 전투에 출진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싸움이 된 것은, 다름아닌 이 카가 잇코우잇키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삿사 나리마사의 실책, 히고 잇키 발발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삿사 나리마사의 실책, 히고 잇키 발발하다 덴쇼 15 년(1587년) 7월 10일 히고 와이후성(隈府城)의 구마베 지카나가(隈部親永)가 영주인 삿사 나리사마(佐々成政)에게 반발해 군사를 일으킨 히고 잇키가 발발했습니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시바타 가쓰이에나 마에다 토시이에와 함께, 노부나가의 천하 통일의 호쿠리쿠 평정 담당이었던 삿사 나리사마, 그는 노부나가의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가쓰이에가 대립했을 때에는, 도야마성에서 가쓰이에 측에 서서 싸웠습니다. 또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했을 때에는 이에야스측에 서 스에모리성을 공격했지요.(스에모리성 공방전), 게다가 극비로 이에야스를 만나기 위해, 경장비로 험준한 타치산을 넘었습니다.(결사의 타치산 넘기) 이렇게 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에이쇼 3년(1506년), 에츠젠에 진공해 온 카가 잇코우잇키를 아사쿠라 소테키(朝倉宗滴)가 격파한 쿠즈류가와(九頭竜川) 전투가 있었습니다. 묘오2년(1493년)에 묘오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당시의 10 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種)를 추방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인형과도 같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11 쇼군에 옹립한 마사모토에 대해서, 요시타네는 호쿠리쿠에 잠복 해서 세력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에이쇼 3년(1506년), 그런 요시타네를 지지하는 세력을 일소할 수 있도록, 마사모토는 혼간지에 협력을 요청하였고, 제9대 법주인 지쯔뇨(実如)가 군세를 일으켰습니다. 사실상 마사모토가 혼간지를 묵인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시로의 쿠니잇키 일본 전국시대;야마시로의 쿠니잇키 분메이 17년 교토 야마시로에서 쿠니잇키기 발발해 하타케야마 양군세에 3개의 요구사항을 제출했습니다. 잇키는 벌써 두개나 보았습니다. 분메이잇키(분메이 잇키 발발)와 카가 잇코우잇키(카가의 잇코우잇키)였지요. 잇키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포스팅하나를 보고 오시면 됩니다. (잇키란 무엇인가?)이 두 잇키는 모두 혼간지 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는데요. 오늘 알아볼 쿠니잇키는 사실 시간상으론 카가의 잇코우잇키보다 3년 앞선 사건이지요. 어쨌든 이 잇키 역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날 코후쿠지대승(興福寺大乗院) 진손(尋尊)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야마시로(山城)의 국민들 중 위로는 60세부터 아래는 15세의 사람까지 모여 집회를 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농민들의 국가? 카가의 잇코우잇키 일본 전국시대;농민들의 국가? 카가의 잇코우잇키 쵸우쿄우(長享) 2년(1488년) 카가에 잇코우 잇키가 일어나 수호인 토카시 마사치카를 할복하게 하였습니다.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가 전 쇼군 요시나리(義教)를 암살한 요시키치의 란을 계기로 카가의 수호대가 된 토가시가가 노리이에(教家)파와 야스타나(泰高)파로 갈려 수호직을 두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아카마츠 마사노리(赤松政則)도 참여해 이 싸움은 복잡해져만 갔습니다. 오닌의 란이 발발하고, 토가시 마사치카와 아카마츠 마사노리는 동군이, 토가시 코우치요는 서군이 되었었지요. 기억나시나요? 카가의 농민들은 후계자 분쟁에서 군비가 징수되고, 전답은 전투로 파괴되며, 남성들이 징집되었습니다. 그 불만을 그들은 속으로 삭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간지 렌노의 요시자키 퇴거 일본 전국시대;혼간지 렌노의 요시자키 퇴거 저번시간에 혼간지가 분메이 잇키(분메이 잇키 발발)에서 마사치카를 도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문명 7년(1475년) 렌노가 요시자키를 퇴거합니다. 혼간지를 중흥시킨 선조라 구가해지는 렌노(蓮如)는 자필의 편지를 여러 편 써서 가르침을 알기 쉽게 전달했으며, 사회적 약자와 여성을 타깃으로 해 많은 신자를 모았습니다. 혼간지는 히에이잔 엔랴쿠지(比叡山延暦寺)에서 독립되 나갔기 때문에, 엔랴쿠지의 승려들은 이를 못마땅이 여겼습니다. 결국 엔랴쿠지의 승병 150명이 혼간지를 습격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도망치전 렌노는 에츠젠의 요시자키에 자리잡은 것이지요.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지역 무사들도 혼간지를 믿기 시작했기에 이제 이들을 건드리는 것은 쉽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