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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6) 야오 전투의 일화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6) 야오 전투의 일화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 5월 6일, 오오사카여름의 진에 있고, 강요해 오는 토쿠가와분과 맞아 싸우는 도요토미분으로, 야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오사카성으로 진군해 오는 도쿠가와군과 그것을 맞아 싸우기 위해 성에서 요격해 나온 도요토미 측에 의해서 각지에서 야전이 전개된 것이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 5월 6일의 일입니다. 다이와 방면에서 오는 도쿠가와군을 도요토미분의 고토 마타베에가 맞아 싸운 도묘지 전투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가 늦게 도착하고 말아, 고토 마타베에와 스스키다 하야토가 죽고 맙니다. 그 후, 유키무라는 진군중인 다테 마사무네와 사투를 밤 넓힙니다만, 농성군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해, 저녁에는 오오사카성으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5) 키무라 시게나리 전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5) 키무라 시게나리 전사 게이쵸 20년(1615년) 5월 6일, 카와치 와카에 전투에서 오사카 측의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가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と)와 싸워 전사 했습니다.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요도도노의 유모인 오오쿠라교 노쓰보네(大蔵卿局)의 아들이었던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 형제와 함께, 성내의 세 부대 중 하나를 맡은 것이 키무라 시게나리입니다. 히데요리 사천왕의 한 명으로 꼽히는 시게나리역시 히데요리의 유모였던 쿠나이교 노쓰보네(宮内卿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게나리는 여러가지 일화를 가지면서도, 그 출자조차 확실치 않은 수수께끼의 사람입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서신이, 위조품으로 의심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3) 고토 모토츠구 전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3) 고토 모토츠구 전사 겐나 원년(1615년) 5월 6일, 오사카 여름의 진의 도묘지, 혼다 전투에서,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後藤又兵衛基次)가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의 화목이 성립하고, 이번 여름의 진이 발발할 때까지 오사카성은 잠시동안의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이 때 오사카 성내에서, 모토츠구의 등을 흘린 나가사와 쿠로베에(長沢黒兵衛)는 그의 전신에 무수한 도상, 피탄의 자취를 보아, 세어 보면 53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고토 모토츠구는 이렇게 이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전국의 세상을 창 한 개로 살아 남아 온 사나이엿습니다. 그는 원래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와 나가마사 부자를 시중든 중신이었습니다. 큐슈 정벌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이나 세키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7) 오사카성 총공격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7) 오사카성 총공격 게이쵸 20년((1615년) 5월 7일, 오사카여름의 진에서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총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전날의 도묘지, 혼다의 전투, 카와치, 와카에 전투, 야오 전투에서 야전을 전개한 도요토미 측은 오사카성으로 퇴각합니다. 그 후, 도쿠가와 측은 대군으로 오사카성을 포위합니다. 이 시점에서 도쿠가와 측은 15만, 도요토미 측은 5만 5천의 군세였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대는 텐노지구치(天王寺口)에서, 히데타다 부대는 오카야마구치(岡山口)에서 총공격을 하는 일을 결정해 텐노지구치에는 혼다 타다토모(本多忠朝) 오카야마구치에는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가 각각 선봉을 맡습니다. 이에 대하는 도요토미 측은 텐노지구치를 사나다 유키무라(真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2) 오사카 여름의 진, 개전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2) 오사카 여름의 진, 개전하다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5월 6일, 오오사카여름의 진이 개전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1) 전초전, 카시이전투에서 반 단에몬 전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1) 전초전, 카시이전투에서 반 단에몬 전사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 4월 29일, 도요토미 측의 야마토 코오리야마성(郡山城) 탈취로 시작된 오사카 여름의 진에 있어, 이즈미 남부의 카시이(樫井)로 도쿠가와 측의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군세와 부딪친 반 단에몬이 전사 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강화가 찢어지다, 오카사 여름의 진 서막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강화가 찢어지다, 오카사 여름의 진 서막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4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오노 하루즈미(大野治純)에게 형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상황을 묻게 했습니다.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은 오사카 여름의 진이 있던 해입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반대 세력을 일소 해 거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22만석이었던 영지를 셋츠, 카와치, 이즈미의 65.7 만석으로 감봉 되어 일개 다이묘가 되어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마무리한 인상이 강한 전투입니다만, 실제로는 도요토미의 세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저번에 써 본적이 있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19일, 오오사카 겨울의 진의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4일, 최초부터 도요토미측이 불리했던 오사카 겨울의 진 중에서, 유일하게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에게 압승한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던 날입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게이쵸 19년(161..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5)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5)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9일, 오오사카동의 진의 야전,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