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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오오쿠보 도시미치 오사카 천도 건의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오오쿠보 도시미치 오사카 천도 건의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19일,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오사카 천도안'을 건의 했습니다.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2일에 군사를 일으킨 막부군의 대열에 1월 3일에 신정부군이 대포를 발해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는 관군의 대승리로 끝납니다. 전년 10월에는 막부측이 대정봉환, 12월에는 왕정 복고의 대호령을 낸 신정부군으로 갈등은 커집니다. 이번 토바 후시미 전투에도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막부는 아직도 건재합니다. 아직도 신정부군은 막부에 대한 역적이라는 이미지를 닦아 낼 수 없었습니다.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1월 19일 관군의 중심 인물의 한 사람인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제출한 것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6) 야오 전투의 일화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6) 야오 전투의 일화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 5월 6일, 오오사카여름의 진에 있고, 강요해 오는 토쿠가와분과 맞아 싸우는 도요토미분으로, 야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오사카성으로 진군해 오는 도쿠가와군과 그것을 맞아 싸우기 위해 성에서 요격해 나온 도요토미 측에 의해서 각지에서 야전이 전개된 것이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 5월 6일의 일입니다. 다이와 방면에서 오는 도쿠가와군을 도요토미분의 고토 마타베에가 맞아 싸운 도묘지 전투에서는, 사나다 유키무라가 늦게 도착하고 말아, 고토 마타베에와 스스키다 하야토가 죽고 맙니다. 그 후, 유키무라는 진군중인 다테 마사무네와 사투를 밤 넓힙니다만, 농성군으로부터의 명령에 의해, 저녁에는 오오사카성으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4) 스스키다 하야토 전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4) 스스키다 하야토 전사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5월 6일, 오사카 여름의 진의 도묘지, 혼다 전투에서, 박전하야토 카네스케가 전사했습니다. 스스키다 하야토 카네스케(薄田隼人兼相)는 코단혼(講談本)에 그려진 검호 이와미 쥬타로우(岩見重太郎)와 동일 인물이라고도 합니다. 그 생년부터 수수께끼의 생을 보낸 무장입니다. 그러나 '유술, 겸상류(柔術,兼相流)'의 시조이며, '검술, 무수류(剣術・無手流)'의 시조 등이라는 것을 보면 상당한 맹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입니다. 당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마마와리(馬廻り)를 맡아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시중들어 3천석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사카 겨울의 진(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2) 오사카 여름의 진, 개전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2) 오사카 여름의 진, 개전하다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5월 6일, 오오사카여름의 진이 개전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1) 전초전, 카시이전투에서 반 단에몬 전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여름의 진(1) 전초전, 카시이전투에서 반 단에몬 전사 게이쵸 20년(겐나 원년 1615년) 4월 29일, 도요토미 측의 야마토 코오리야마성(郡山城) 탈취로 시작된 오사카 여름의 진에 있어, 이즈미 남부의 카시이(樫井)로 도쿠가와 측의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군세와 부딪친 반 단에몬이 전사 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강화가 찢어지다, 오카사 여름의 진 서막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강화가 찢어지다, 오카사 여름의 진 서막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4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오노 하루즈미(大野治純)에게 형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상황을 묻게 했습니다.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은 오사카 여름의 진이 있던 해입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반대 세력을 일소 해 거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22만석이었던 영지를 셋츠, 카와치, 이즈미의 65.7 만석으로 감봉 되어 일개 다이묘가 되어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마무리한 인상이 강한 전투입니다만, 실제로는 도요토미의 세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저번에 써 본적이 있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19일, 오오사카 겨울의 진의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5)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5)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9일, 오오사카동의 진의 야전,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