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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요시히로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큐슈의 패자, 시마즈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큐슈의 패자, 시마즈 가문 전국시대의 큐슈는 류조지, 시마즈, 오오토모 세 가문이 난립하는 마치 삼국지와 같은 형태였습니다. 그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전국의 큐슈를 통일하려 한 것은 다름아닌 시마즈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해 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큐슈정벌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시마즈 가문의 성립 시마즈 가문의 출자에는 코레무네(惟宗), 미나모토 (源), 후지와라(藤原)의 후예라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나모토나 후지와라 같은 경우는 단지 자신의 출자를 미화하기 위해서 같다 붙인 것입니다. 실제로는 코레무네 가문의 출자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들이 시마즈 장(島津庄)을 하사받아 스스로 '시마즈'라 칭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시마즈는 미나모토노 요리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7) 적도 놀래키다! 시마즈의 배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17) 적도 놀래키다! 시마즈의 배진 게이쵸5년(1600년) 9월 16일, 세키가하라 전장에서 탈출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토키무라(時村)에 도착해 미즈구치(水口)를 거쳐, 오사카로 향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시마즈대는 끝까지 서군으로서 전장에 남아있었습니다. 시마즈대는, 전투의 한중간, 완전히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보다 모산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자를 보내고 참전을 재촉해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싸움을 한다.'라며 끝까지 관망했습니다. 시마즈대를 인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와 두 명의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4 형제'로 알려진 사츠마의 무장입니다. 원래 시마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맹세를 주고 받은 사이여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6) 쇼나이의 란과 쵸주인 모리아츠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16) 쇼나이의 란과 쵸주인 모리아츠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사츠마의 전국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의 '후토코로카나타(懐刀: 호신용 칼)'로 불린 쵸주인 모리아츠(長寿院盛淳)가 전사 했습니다. 오늘의 주역인 초주인 모리아츠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시다. 그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에서 관령직을 대대로 계승하고, 오닌의 란의 발단이나 되는 상속자 분쟁이 있었던 하타케야마씨의 분가의 사람입니다. ,본명은 하타케야마 모리아츠(畠山盛敦)입니다. 조부의 대에 사츠마로 옮겨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리아츠 자신은 3세에 코노야마에서, 11세부터 쵸주인(長寿院)에서 공부한 승려로, 그 출가한 후의 이름이 쵸주인 입니다. 그래서 일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요시히사 배수의 진 타카성,네지로자카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마즈 요시히사 배수의 진 타카성,네지로자카 전투 덴쇼 15년(1587년) 4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의 마지막 전투인 타카성, 네지로자카 전투(根白坂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덴쇼 13년(1585년)의 3월~4월에는 기슈(기슈정벌)를, 6월~7월에는 시코쿠(쵸쇼카베 모토치카, 히데요시에 항복)를 평정 해, 순조롭게 천하 통일에의 길을 걷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지만 아직 큐슈에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 해의 오키타와테 전투의 류조지를 물리친(다테나와테 전투) 사츠마의 시마즈가가 큐슈 전 국토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그는 큐슈로 향합니다. 하시만 센고쿠 히데히사가 이끌던 시마즈 정벌군은 토츠키가와에서 대패하고 맙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전국시대의 평균수명과 장수한 무장들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전국시대의 평균수명과 장수한 무장들 전국시대의 평균수명은 35세 정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의료시설과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짧은 수명을 가졌는데, 여기에 전란이 거듭되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40~50세 사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장수하는 무장들이 있었습니다. 장수한 나이별로 등수를 매겨 보았습니다. 1위 호조 겐안(北条幻庵) 97세의 장수를 자랑한 무장입니다. 호조 소운의 아이로서 탄생해, 호조의 5대 우지나오(氏直)의 시대까지 살았습니다. 그 생애는 가히 호조가의 발호와 멸망을 지켜본 생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위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 93세의 장수를 자랑한 류조지 이에카네는 쇼니가와 분쟁하며 류조지가의 재흥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의 큐슈정벌(2) 시마즈의 선방, 토츠기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의 큐슈정벌(2)시마즈의 선방, 토츠기가와 전투 덴쇼 14년(1586년) 11월 25일, 드디어 큐슈를 제압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한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과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츠루가성(鶴賀城) 근처의 토츠기가와(戸次川)에서 맞닥드려 토츠키가와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미미가와 전투(미미가와 전투)의 승리 후에그 세력을 큐슈 전 국토에 넓힐 기세로 분고의 오오토모를 압박하는 사츠마의 시마즈, 이 압박에 의해 오오토모 소린은 덴쇼14년(1586년) 시코쿠를 평정 하고, 천하 통일을 눈 앞에 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부탁합니다. 한편 시마즈는 다테나와데 전투(다테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가를 무찌르며 세력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덴쇼 14년 7월에는 시마즈가 이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2) 미미가와 전투의 막이 오르다 타카기카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2)미미가와 전투의 막이 오르다타카기카와 전투 덴쇼 6년(1578년)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과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와의 미미가와 전투의 초전 타카기카와 전투가 있었습니다. 덴쇼 5년(1577년)의 기자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대패를 당해, 휴우가의 남쪽을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구원을 요청해, 시마즈와의 항전을 결의한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은 휴우가의 땅 일부 양도를 약속받아, 크리스찬의 이상향 뮤지카를 지으려 했습니다. 이전의 부인과 이혼하고 크리스천인 새부인 쥴리아를 맞이해 본인도 돈 프란시스코로 개명해, 아들에게 다이묘 자리를 주고 출진합니다. 소린은 3만 5천의 군세를 해로로 이끌어 용이하게 후유가로 진출해 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