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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타가하라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라타가하라 전투(3) 다케다와 오다의 운명이 갈린 시라타가하라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라타가하라 전투(3)다케다와 오다의 운명이 갈린 시라타가하라 전투 덴쇼 3년(1575년) 시라타가하라에서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과 다케다군이 부닥쳤습니다.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보였습니다. 다케다 가쓰요리가 이끄는 약 1만 2000의 군사는 시라타가하라에 진군해 학익진을 펼쳤습니다.(일본 전국시대의 진형) 한편, 렌고가와(連吾川)를 끼고, 정면에서 마주 보는 형태로 포진 한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 다케다 가쓰요리군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6 시경 가장 왼쪽에 포진한 선봉 야마가타 마사카게(山県昌景)가 개전을 고하는 북을 치고, 목책의 좌측을 돌아, 도쿠가와군의 오오쿠보 타다요(大久保忠世)와 격돌합니다. 타다요는 과감하게도, 총포대를 목책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시라타가하라 전투(2) 사카이 타다츠쿠의 토비가쓰야마 성채 기습 일본 전국시대;시라타가하라 전투(2) 사카이 타다츠쿠의 토비가쓰야마 성채 기습 덴쇼 3년(1575년), 다케다 가쓰요리의 본대가 시타라가하라를 향한 뒤에, 사카이 타다츠구가 토비가쓰야마 성채에 기습을 걸어에 출발했습니다. 3만에 달하는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 시타라가하라에 진을 치고 성채나 망루를 쌓고 있는 와중에, 다케다 본대 내에서는 계속해서 군의를 가집니다. 퇴각인가, 결전인가에 대해 논의를 계속하나,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 무려 3만에 달하지만 그에 비해 다케다군 절반 정도인 1만 5,000이었기 때문에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등 신겐때부터 다케다를 섬긴 중신들은 모다 퇴각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쓰요리의 측근인 아토베 카쯔스게(跡部勝資)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타라가하라 전투(1) 전투의 서막이 올라가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타라가하라 전투(1) 전투의 서막이 올라가다 덴쇼 3년(1575년) 미카와 나가시노성 구원에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 약 3만이 시타라가하라(設楽原)에 도착했습니다. 나가시노성이 공격을 받자(나가시노성 공방전), 나가시노성의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전령을 보내(토리이 쓰네몬 가츠아키) 이야에스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이야에스는 미카타가와라의 상처를 입은 상태로, 별로 힘이 없었습니다. 이야에스는 결국 동맹인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이때가지도 반 노부나가 동맹은 건재한 상태지만, 노부나가는 결단을 내려 다케다군을 막으러 이동합니다. 재빠르게 오사카에서 기후로 이동한 그는 어느새 3만을 인솔해 기후를 출진해 오카자키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야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