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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누가 관령의 후예가 될 것인가? 후나오카산 전투 일본 전국시대;누가 관령의 후예가 될 것인가? 후나오카산 전투 에이쇼8년(1511년),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후에 발발한, 일련의 후계자 분쟁인, '후나오카산 전투'가 있었습니다. 난세의 효웅으로 불린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 그는 '묘오의 정변'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쇼군에 자신의 괴뢰를 앉히게 됩니다. 나중에 한번 묘오의 정변에 대해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극상으로, 전국의 막을 열며 권력을 쟁취한 이 남자는 결국, 가신에게 암살이라고 하는 하극상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사모토는 생전 여성에겐 흥미가 없어 독신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할 수 있는 양자만이 세 명 있었습니다. 관백 구조 마사모토(九条政基)의 아들 스미유키(澄之), 아와의 호소카와가에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다메카케의 에치고 평정 일본 전국시대;나가오 다메카케의 에치고 평정 에이쇼4년(1507년) 8월 7일, 나가오 다메카케(長尾為景)에 에치고를 빼앗긴 우에스기 후사요시(上杉房能)가, 마츠노야마고우(松之山郷) 아마미즈코시(天水越)에서 할복 했습니다. 나가오가는 대대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를 시중드는 수호대 집안입니다. 관동 관령직을 독점하고 있던 같은 우에스기가 내에서,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관동의 패권을 두고 싸운 에이쇼 원년(1504년)의 쿠즈류가와 전투(쿠즈류가와 전투)에서는 다메카케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를 도와 참전했었습니다. 이런 그가 어째서 우에스기가에 반기를 들게 되었을까요? 가마쿠라쿠보가 기억나시나요? 그런데, 에치고에는 원래 그 토지를 지배하는 강력한 호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에스기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아사쿠라 소테키의 잇키 격퇴, 쿠즈류가와 전투 에이쇼 3년(1506년), 에츠젠에 진공해 온 카가 잇코우잇키를 아사쿠라 소테키(朝倉宗滴)가 격파한 쿠즈류가와(九頭竜川) 전투가 있었습니다. 묘오2년(1493년)에 묘오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당시의 10 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種)를 추방해, 자신의 뜻대로 되는 인형과도 같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11 쇼군에 옹립한 마사모토에 대해서, 요시타네는 호쿠리쿠에 잠복 해서 세력 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에이쇼 3년(1506년), 그런 요시타네를 지지하는 세력을 일소할 수 있도록, 마사모토는 혼간지에 협력을 요청하였고, 제9대 법주인 지쯔뇨(実如)가 군세를 일으켰습니다. 사실상 마사모토가 혼간지를 묵인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관동의 정세가 움직이다, 타치강변 전투 일본 전국시대;관동의 정세가 움직이다, 타치강변 전투 에이쇼 원년(1504년),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와 호조 소운이 동맹해, 대립하고 있던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와 타치강변(立河原)에서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을 기반으로 하는 무가 정권이면서, 교토에 정무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동 지배를 위한 특별한 직무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마쿠라쿠보와 관동 관령입니다만, 그들은 차츰 교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게 되어 서서히 쇼군과 대립하게 됩니다. 쿠보의 보좌인 관동 관령은 우에스기가가 독점하고 있고, 관동의 힘이 커져감에 따라 그 세력도 커져갔습니다.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가 교대로 관동 관령을 맡게 됩니다만 권력은 독점하고 싶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호조소운의 오다와라성 탈취 일본 전국시대; 호조소운의 오다와라성 탈취 묘오4년(1495년), 호조소운이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扇谷上杉)가의 중신 오오모리 후지요리(大森藤頼)가 지키는 오다와라성을 탈취했습니다.(년도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전국 3효융의 하나이고, 유일하게 5대, 100년에 걸쳐 군림한 호조가, 이 호조가가 대대로 본거지로 한 오다와라성은 원래 오우기가야즈 우에스기가의 성이었습니다. 사실 자세한 기록이 없기에 상세한 사항은 거의 모르는 것이 현실입니다. 엔토쿠워년(1491년), 혹은 묘오2년(1493년)에, '이즈습격'으로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차차마루를 추방하고 이즈를 손에 넣은 소운은, 관동 관령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 휘하에 있었습니다.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의 당주인 우에스기 사다마사는 오오타 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일본 전국시대;전국시대의 또다른 개막, 호조소운의 이즈습격 엔토쿠(延徳) 3년(1491년) 또는 묘오(明応)2년(1493년),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아시카가 막부의 분가, 호리코시 쿠보(堀越公方)를 공격해, 멸망 시킨 싸움인 '이즈 습격'이 있었습니다. 분가라고는 해도 막부가 지방의한 무장에 멸해졌다는 이 이즈 습격을 전국시대의 개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는 않습니다. 엔토쿠 원년, 초대의 호리코시 쿠보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가 병사합니다. 그에게는, 적자 차차마루(茶々丸)와 측실 엔토쿠인(円徳院)이 낳은 쥰도우지(潤童子)라고 하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차마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양아치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흉포했기 때문에, 미치광이들을 가두어 두는 방과 같은 곳에 가두어 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우미군에서 쇼군이 기습당하다 일본 전국시대;오우미군에서 쇼군이 기습당하다 쵸우코우 원년, 오우미군(近江鈎)에 포진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롯카쿠 타카요리(六角高頼)의 부하 코우가 타케시(甲賀武士)등이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오닌의 난이후 막부 쇼군과 여러 다이묘들은 자주 대립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에서 오미(近江)남부의 전국 다이묘 롯카쿠 다카요리는, 오미우치의 문신령이나 절, 신사령을 계속 점거합니다. 당연, 문신이나 절, 신사는 무로마치 막부 제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 호소해 요시히사도 다카요리에게 퇴거하도록 언도합니다. 하지만 아시카가 쇼군의 군사력의 실추와 하극상의 도래 그리고 전국시대의 시작을 느끼고 있던 타카요리는, 쇼군의 말을 무시합니다. 타카요리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을 안 요시히사는, 쵸우코우원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시로의 쿠니잇키 일본 전국시대;야마시로의 쿠니잇키 분메이 17년 교토 야마시로에서 쿠니잇키기 발발해 하타케야마 양군세에 3개의 요구사항을 제출했습니다. 잇키는 벌써 두개나 보았습니다. 분메이잇키(분메이 잇키 발발)와 카가 잇코우잇키(카가의 잇코우잇키)였지요. 잇키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포스팅하나를 보고 오시면 됩니다. (잇키란 무엇인가?)이 두 잇키는 모두 혼간지 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는데요. 오늘 알아볼 쿠니잇키는 사실 시간상으론 카가의 잇코우잇키보다 3년 앞선 사건이지요. 어쨌든 이 잇키 역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날 코후쿠지대승(興福寺大乗院) 진손(尋尊)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야마시로(山城)의 국민들 중 위로는 60세부터 아래는 15세의 사람까지 모여 집회를 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일본 전국시대;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분메이 11년(1479년), 오닌의 난( 오오닌의 난) 이후에 교토에 머물렀던 야마나 마사토요가 영토인 타지마로 돌아왔습니다. 야마나 마사토요는, 오닌의 난에서 서군의 대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손자(일설에는 아들)입니다. 동군의 대장인 호소카와 가쓰모토 사후에 그의 아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화평을 맺어, 오닌의 난을 끝낸 사람이지요. 이 오닌의 난을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대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막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오닌의 난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무렵은, 동서 양자가 활발하게 전투를 벌이면서도, 막부아래에 관령가가 있고, 그 아래에 수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요도하라의 전투 일본 전국시대;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요도하라의 전투 분메이 9년(1477년)에 제갈공명의 재래라 일컬어지는 오오타 도칸과 좌절된 자신의 야망을 위해 군세를 일으킨 나가오 가게하루, 두명의 일전인 요도하라(用土原)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애초 나가오가는 우에스기가의 집사집안이지만, 그 세력은 매우 거대했습니다. 그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우에스기가에서는 가게하루를 후계에 앉히지 않은 것이지요. 이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오오타 도칸은 이 반란의 심각성을 깨달고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定正)와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顕定)에게 가게하루를 회유하거나 진압하라고 진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코가쿠보(古河公方)를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중이었기 때문에 무시했습니다. 분메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