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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2차 죠수 정벌(7) 세키슈우구치 공방전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2차 죠수 정벌(7) 세키슈우구치 공방전



 게이오 2(1866년) 6월 16일, 제2차 조슈 정벌에 오구라구치와 세키슈우구치의 공방전이 개시되었습니다. 


 게이오 2(1866년) 6월 8일, 조슈쪽의 관문 스오우 오오시마에 막부군의 군사가 상륙해, 제2차 조슈 정벌의 막이 열렸습니다. 에도 막부는 일본의 정부입니다. 이를 상대로 싸우는 조슈는 1 지방에 불과합니다. 작전을 잘 짜지 않는다면 패배는 명약관화합니다. 조슈에는 방비를 굳혀야 할 거점이 있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진 이래, 거점이 되어야 할 성을 구축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난공불락과는 거리가 먼 하기성에서 에도시대를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 해야할지, 이것이 조슈 정벌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은 막부를 상대로 하는 일개 번인 조슈측 이었습니다. 이 전황을 바꾼것은 다카스키 신사쿠의 오오시마 탈환작전이었습니다.(오오시마 탈환)  이 세키슈우구에서 지조슈측의 지휘를 맡은 것은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였습니다. 사실 막부측에서 이쪽에 위치하는 것은, 후쿠야마번, 하마다번, 츠와노번입니다만, 지리상으로 가장 앞에 있는 것은 츠와노번이었습니다. 그런데 츠와노번은 조슈의 군사가 영내에 들어 와도 방어는 커녕, 군사를 통과시켜 버립니다. 



키시 시즈에 전사지



 조슈는 성을 크게 우회 해 통과합니다. 오랜 세월 사이 좋게 지낸 2번은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겠지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츠와노를 통과한 조슈는 하마다번과의 경계선인 오기하라 관문(扇原関門)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곳에는 하마다번의 키시 시즈에(岸静江)라고 하는 무사가 몇 안 되는 부하와 농민 부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조슈의 진군을  이들은 이 인원수로는 어쩔 수 없다라고, 후쿠야마번에 원군의 요청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후쿠야마번에서는 대답도 받지 못한 채로 끝나 버렸습니다. 결국 시즈에는 부하와 농민병을 먼저 보내고, 가도에 혼자 서서 '이 앞으로는 갈수 없다'라며 소리를 칩니다.


 전국시대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19세기 조슈번의 군사들이 쏜 수십발에 총탄에 관철된 그는 쓰러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 모습 자체는 일본의 무사도에 훌륭히 부합하는 것으로, 조슈번의 병사들도 깊게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키슈우구에서는 이 다음날, 하마다 내의 마츠다에서 조슈군과 맞서 싸우는 후쿠야마번의 군사가 만부쿠지(萬福寺)에서 교전했습니다. 후쿠야마번은 결사의 각오로 싸워 격전이 되었습니다만, 가지고 있는 총이 달랐습니다. 조슈는 600 m리가 사정거리인 미녜총이었지만,  후쿠야마번의 게이벨총은 사정거리가 그 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조슈의 총 솜씨는 대단했습니다. 후쿠야마번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대장 클래스를 족족 저격시켜 버리자, 후쿠야마번의 사기는 내려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마츠다는 조슈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2차 조슈정벌 개요도



 한편의 오구라구치에서는 6월 16일밤, 조슈 주력 군함 헤이인마루(丙寅丸)에 탑승해, 다노우라 만으로 향한 타카스기 신사쿠는 기습을 결행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척 잇츄우마루(乙丑丸)에 탑승해 사카모토 료마는 모지포로 향했습니다. 평소부터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우에 전투를 구경시켜달라고 부탁하던 료마는 이 배를 탄 채로 모지에 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노우라와 모지 양쪽에서 포격을 개시합니다. 그 혼란을 타 상륙한 조슈병은 막부의 포대를 부수어, 자금이나 탄약을 훔치고 바로 떠나버렸습니다. 막부도 후지잔마루(富士山丸)라는 훌륭한 군함이 있었지만, 이 배는 증기선으로 발진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조슈번 측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게다가 조수의 흐름도 불리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들은 막부측에 큰 충격을 주어, 전황은 확실히 이곳에서 변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