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데라다야 사건
분큐 2년 연(1862년) 4월 23일, 사츠마 번사끼리의 항쟁 사건인 '데라다야 사건(寺田屋事件)'이 있었습니다.
타이쇼(大正) 시대가 되어 경진전철(京津電車)이나 교토와 오사카 전철이 개통할 때까지, 여객선인 산짓코쿠부네(三十石船)은 교토~오사카 간의 교통을 담당했습니다. 오사카측은 텐마바시(天満橋)에 있는 하치켄야선착장(八軒屋船着場), 교토측은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이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교토~오사카간을 육로로 이동하는 쿄카이도우(京街道)도 연결되어 후시미는 확실히 교통의 요지로, 많은 숙박 시설이 늘어서 대단한 활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시미에 있는 한 채의 선숙 데라다야는 사츠마 번저가 가깝기도 해 당시, 사츠마번의 정 숙소였습니다.
데라다야 사건
사건은, 분큐 2년년(1862년)의 4월 23일,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일본은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기였습니다. 막부인가 존왕(덴노)인가로 두동강로 나뉘고 있었을 무렵입니다. 그런 중에 사츠마 번주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공무합체'란, '14 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和宮)의 결혼을 계기로 덴노와 막부가 협력해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시마즈 히사미츠는 그 공무합체 파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츠마번 가운데에도 '막부를 단념해 지금부터는 덴노를 중심으로 하자'는 존왕파의 젊은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4월 23일, 데라다야에 모여 있던 것은 그런 존왕파의 사츠마 번사들이었습니다. 이 날, 아리마 신시치(有馬新七)와 사츠마 번의 동지들, 그리고 존왕파의 지사들은, 관백 쿠조 히사타다(九条尚忠)와 교토 죠시다이(所司代) 사카이 타다요시(酒井忠義)를 습격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사츠마번측에 들키고 있어,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츠마번에서 파견된 것이, 나라하라 시게루(奈良原繁) 이하 9명의 번사들이었습니다. 한밤 중의 데라다야의 현관을 통해 들어간 방에서 나라하라는 어떻게든 아리마 신시치에게 사츠마 번저에 오도록 설득합니다만, 말싸움을 하다 갈등이 커져, 숙소는 큰소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아리마 등 존왕파 중 7명이 사망해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츠마 9열사의 묘지
2층에도, 존왕파의 지사들이 있었습니다. 나라하라가 칼을 버려 설득에 임해, 나머지의 사람들은 투항했습니다. 결국, 부상당했던 2명도 다음날에 할복 자살을 명령받아 지사들은 각각의 번에 보내졌습니다. 실은 '공무합체'를 추진하기 위해서 방해였던 사츠마 번내의 존왕파를 처리할 계획은 이전부터 있던 것 같습니다. 이 날, 그들이 모이든지 모이지 않든지 방해자는 제거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단번에 공무합체파가 된 사츠마 번과 시마즈 히사미츠는 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에도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에도로 돌아가는 길에 예기치 못한 사태에 조우합니다. 그의 수행을 하고 있던 사무라이가 영국인을 살해해 버린다고 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발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발하는 일련의 영국과의 항쟁으로 히사미츠와 사츠마번은 반대로 '개국, 토벌 막부 파'로 변해 버립니다. 오히려 조슈와 협력해 막부를 토벌하는 선두에 서게 되 버렸습니다. 그 뒤에 반역자로 다루어지던 데라다야 사건의 9명의 피해자는 오히려 선구자인 '사츠마 9열사'가 되어 남았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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