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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미카타가와라 전투(3) 이야에스 다케다에 참패하다, 미카타가와라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미카타가와라 전투(3) 

이야에스 다케다에 참패하다, 미카타가와라 전투



 겐키 3년(1572년) 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애로 최대 패전 미카타가와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의 상경로 입니다


 4만 5천의 대군을 인솔해 가이를 출발, 교토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가는 다케다의 앞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는 하마마츠성이 가로막습니다. 군사의 수가 훨씬 뒤떨어지는 이에야스는 농성 작전을 취해, 쳐들어 오는 다케다군에 대비합니다. 하지만 다케다군은 이에야스를 무시해 하마마츠 성벽아래를 그냥 지나치려고 합니다. 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이야에스지만 이때는 아직 혈기를 가진 젊은이었지요. 이대로 통과시키는 것은 가문의 수치라며 가신들의 의견도 듣지 않은채, 미카타가와라에 진군합니다. 

학익진(좌)과 어린진(우)




이에야스가 인솔하는 도쿠가와군의 전투 대형은 '학익진'(鶴翼の陣)이었습니다.  넓게 군세를 배치해, 어디에서 공격받아도 대처할 수 있는 전투 대형입니다. 하지만 도쿠카와는 병력이 적기 때문에 가운데가 격퇴 되면, 군세가 두갈래로 나뉘어 완패가 될 가능성이 있는 진이었습니다. 

 한편, 신겐이 인솔하는 타케다군의 전투 대형은'어린진(魚鱗の陣)' 물고기의 비늘의 형태로, 정확히 중심부에 대장이 위치하는 진입니다. 다케다의 목적은 적을 넘어뜨리는 일이 아니고, 적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 대형으로, 한 곳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의 다양한 진영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옆 링크를 눌러 주세요.(일본 전국시대의 진형)



미카타가하라 포진도

 이렇게 해서, 겐키 3년(1572년) 12월 말, 이에야스의 가신 이시카와 가즈마사(石川数正)의 돌격에 의해, 미카타가와라 전투의 포문이 열렸습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이에야스는, 진에서 가만이 있지 못하고, 스스로 선두에 서 적진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적은 수의 '학익진'은 보기좋게 깨어져 순식간에 도쿠가와군의 패전의 색이 짙어집니다. 결사 각오로 적진에 돌진하려고 한 이에야스를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가 멈춥니다. 그는 이에야스의 말의 엉덩이를 창으로 쳐서 퇴각 시킵니다.

 이에야스는 필사의 생각으로 도망갔지요. 지나친 공포에 말등에서 실례를 해 버리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가신들에게는, '그것'은 된장이라고 변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귀환 직후의 비참한 모습을 화가에게 그리게 해, 자신에게의 훈계와 자손에게의 교훈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성으로 돌아온 이야에스는, 유즈케(湯漬)를 먹어 지쳤다 라고 하고 성문을 연채 잠들었다고 합니다.


미카타가와라 전투 그림



 이야에스의 미친듯한 행동은 의외로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신겐은, 명백하게 열린 성문에 들어가는 일은 없고, 심지어 추격을 그만두고 군사를 퇴각시켜 군세를 정돈한 후, 다시 서쪽으로 향합니다. 사실 신겐에게 이야에스는 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겠지요. 굳이 진격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야에스의 이 실책은 의외로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무튼 당대에 최강의 실력자와 맞붙은 사실은 남기 때문에 그는 후에 '동해도제일궁(海道一の弓)'이라고 불리지요. 네, 예전에 바로 그 요시모토가 불린것과 같은 이명입니다. 이야에스의 가장 존경하는 무장은 오다 노부나가가 아닌 다케다 신겐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전투로 더 성장해 후에 천하를 거머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