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가마쿠라, 쓰루카오카하치만궁 전투

일본 전국시대;

가마쿠라, 쓰루카오카하치만궁 전투



 다이에이6년(1526년), 오와(安房)의 전국 다이묘 사토미가가, 사가미의 후호조의 거점인 카마쿠라를 공격한 쓰루오카하치만궁 전투(鶴岡八幡宮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오와국 위치



 전국시대의 개막, 화려하게 그 무대에 뛰어 오른 사가미의 호조 소운. 그 소운에게서 배턴을 건네받은 2대째 호조 우지쓰나였지만 군웅할거, 하극상이 만연한 전국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이웃나라 오와의 사토미가와는, 항상 일촉즉발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다이에이5년(1525년)에는, 사토미가의 수군이 미우라 반도에 상륙 작전을 시도했습니다만, 후호조가의 분전에 의해 상륙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해, 사토미가는 다시 에도 만을 배로 넘고 미우라 반도에 쳐들어갑니다. 이 때의 사토미의 군세는 대소 수백척의 군선을 인솔한 대군이었습니다. 카마쿠라에 상륙하려고, 노도와 같이 밀려 드는 사토미의 수군에 후호조가는 당황해서 배를 내 응전합니다. 그러나, 해전에서는, 주도면밀한 준비 끝에 도전해 온 사토미의 군세가 승기를 잡습니다. 사토미군은 군선의 정면으로 미끼의 인형을 설치한 뒤 키타죠를 도발하고, 상대가 완전히 지쳐 버렸을 무렵을 가늠해 그 때, 돌이나 목재를 던집니다. 여기에 적의 시야가 못박혀 있는 사이에 별동대가 야음을 틈타 잠복해 앞에 나온 후호조가에  기습을 한다는 작전이 큰 성공을 거뒤 카마쿠라에의 상륙에 성공합니다. 


 파죽지세로 사토미군은 가마쿠라로 향해 시가전에 돌입했습니다. 가마쿠라는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의 바로 앞의 마을입니다. 이 전투가 진행되다,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은 타 버립니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한 사토미가도 이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을 태울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고, 겐지의 수호신인 이 궁을 구워 버린 일을 이후에도 후회해 곧, 군선을 거느리고 오와로 돌아와 버립니다. 물론, 후호조의 방어가 대단하기도 했겠지만, 비교적 너무 시원스럽게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무승부라고 볼 수 있겠네요.



쓰루카오카 하치만궁



 그런데, 이 전투의 사토미측의 대장이, 사토미 요시토요(里見義豊)인가? 아니면 사토미 요시타카(里見義堯)인가? 라는 것도 애매한 문제입니다. 사실, 사토미가는 당시 후계자 분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사토미씨의 삼대 당주 사토미요시미치(里見義通)가 죽고, 그 후계자는 장남의 요시토요가 계승합니다. 하지만 그가 어리다고 하는 이유로, 요시미치의 동생 사네타카(実堯)가 후견인이 됩니다. 그러나 일단 실권을 잡은 사네타카는, 몇 년 경과해도 요시토요에 당주의 자리를 되돌려 주지 않습니다. 이 쓰루가오카하치만궁 전투도 제 몫을 하게 되었는지 요시미치의 실력을 보는 전투였다고 하는데요. 이 전투가 끝난 후도, 이러니 저러니 말해 계속 눌러 앉았습니다. 이에 선대부터의 중신에게서는 서서히 불만도 나오기 시작할 때 결국 요시미치는 사네타카를 습격해 살해합니다. 



 사네타카의 아들 요시타카가 이를 보고 입다물고 있을 리가 않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원수!'라며 군사를 일으켜 이나무라성(稲村城)을 공격한 '이나무라성의 싸움' 으로 요시미치을 할복시키고 권력을 쟁취합니다. 이 일련의 내분은, 쓰루가오카하치만궁의 싸움의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 여기서 승자가 된 요시타카가, 자신이 본래의 후계자인 요시미치를 토벌한 일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역사를 고쳐 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근년 발견된 고문서에 의하면, '요시미치는 상속했을 때 벌써 어른이였고, 숙부 사네타카가 후견인이 되는 일은 없었다'라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쓰루가오카하치만궁 전투의 대장은 요시미치겠지요. 여하튼 지금부터 앞으로, 키타죠가와 사토미가의 항쟁은 아시카가가의 쿠보를 말려 들게 해 한층 더 복잡한 구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