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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노부토라의 가이 통일 이이다 강변 전투

일본 전국시대;

노부토라의 가이 통일 이이다 강변 전투



 다이에이 원년(1521년), 가이(甲斐)에 진공한 후쿠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를,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가 격퇴한 이이다 강변 전투(飯田河原の戦い)가 있었습니다.



가이국 위치



 이 전투에 대해 역사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이 없습니다. 중세 가이국의 기본 사료인 '카츠야마기'에도, 어떠한 상황이었는가 자세한 기술은 없고,  원래 후쿠시마 마사나리의 가이 진공에 관해서도 당시 스루가의 전국 다이묘였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명령에 의해서라는 이야기와 반대로 마사나리가 이마가와 대립한 끝 독단으로 진공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이이다 강변 전투에서 이어지는 카미죠(上条)강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여겨지는 마사나리도, 정말로 이때 전사했는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하네요.


 이 해의 2월말 무렵, 스루가의 이마가와씨의 중신인 토가타(土方城)성의 성주 후쿠시마 마사나리가 1만 5천의 대군을 인솔하고 가이의 남부로 옵니다. 이 때, 가이 일국을 거의 수중에 넣고 있던 것은 다케다 노부토라였습니다. 하지만 이 가이의 평화는 이마가와의 지원을 받으면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던 가이 서부의 고쿠민 오오이 노부타츠(大井信達)의 딸 을 노부토라가 신부로 취해 이루어진 것으로,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9월에는, 가이국내의 토미타성(富田城), 카츠야마성(勝山城)등을 공략하면서 한층 더 북상한 후쿠시마의 군세는 노부토라의 본거지 츠츠지가사키 관(躑躅ヶ崎館)으로 진군합니다. 이에 위기감을 가진 노부토라는 당시 임신중이었던 오오이 부인을 요가이잔성(要害山城)에 이동시키고, 스스로 2천의 군사를 인솔하고 이이다 강변에서 적을 맞아 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황도


  이 때는, 수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다케다군이었지만,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노부토라는 허병의계(군사의 수를 많아 보이게 한다)를 구사해, 적의 장병 수백기를 공격해 취하는 대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일만 오천의 군세는 조금 후퇴한 것만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오이 부인이 11월 3일에 사내 아이를 출산했다고 하는 뉴스가 진중에 퍼집니다. 후계자의 탄생에 사기 오르는 타케다세, 이 사내 아이는 하루노부(晴信)라고 명명됩니다만 아시다시피 이 아이가 바로 다케다 신겐입니다. 장병들의 사기의 상승은, 그대로 타케다측의 순풍이 되었고 양자는 카미죠 강변의에서 전투에 돌입합니다. 


 이번 충돌은 무승부에 끝났지만, 그 다음날 심야에 펼쳐진 다케다군의 야습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습니다. 다케다군은 또 다시 수백기의 적을 토벌했습니다. 후쿠시마세의 총사망자는 4천에 대장 마사나리 이하 많은 중신이 전사한 타케다측의 대승리였습니다. 그럼에도 후쿠시마군이 철퇴한 것은 다음 해가 되고 나서로, 역시 수수께끼가 많은 전투입니다. 하지만, 이만큼의 병력의 차이가 있으면서 적에게 대승리를 거둔 것은 예의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상태 있던 가이의 국민들이 외적의 침입에 위기감을 안아 다케다의 아군으로서 참전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노부토라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이 전투는 결국 노부토라의 가이 통일을 가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