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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노지의 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혼노지의 변의 서막, 노부나가의 사카이 마을 공격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혼노지의 변의 서막, 노부나가의 사카이 마을 공격 에이로쿠 12년(1569년) 오다 노부나가가 군자금을 요구해, 저항한 미요시 삼인중을 쫓아버리고 사카이(堺)의 마을을 공격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상경을 완수한 오다 노부나가의 군세는 신사적인 태도로 꽤 평판이 좋고 상경 후 1개월에 교토를 거의 지배합니다. 교토에서 노부나가의 눈을 끈 것이 활기찬 사카이 마을이었습니다. 사카이는 당시 '네코쥬(会合衆)'라는 상인들의 대표자에 의한 자치로 운영되고 있는 독립국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총의 제조도 독점 했기 때문에 이렇게 경제발전을 계속하는 사카이 마을을 지배하면 방대한 세를 징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에이로쿠 11년(1568년) 사카이에 군자금 2만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바타성 함락, 시바타 시게이에의 할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바타성 함락, 시바타 시게이에의 할복 덴쇼 15년(1587년) 10월 28일, 우에스기 카게카쓰(上杉景勝)의 총공격을 받고 있던 시바타성(新発田城)이 함락 되어,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가 할복 했습니다. 시게이에의 시바타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에치고 북부에 세력을 자랑한 아카키타중(揚北衆)인 사사키(佐々木) 가문의 분가 중 하나입니다. 원래는 가마쿠라 시대에 막부에서 장원의 지도우(地頭:장원 관리직)을 하라는 지시를 받아, 쭉 이 땅을 지켜 왔다고 하는 자긍심도 있어, 남북조 이후에 수호가 된 우에스기, 하물며 그 아래의 수호대인 나가오와는 계속 갈등하던 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족끼리의 분쟁이나 분열을 반복하며 서서히 힘이 쇠약해져 이윽고 나가오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8) 미쓰히데 생존설 일본 전국시대;혼노지의 변(8)미쓰히데 생존설 혼노지의 변은 단 하루의 사건이지만 전국시대는 이 사건에 이전과 이후로 바뀌는 데다 의문점이 상당히 많은 사건이지요. 이 사건을 일으킨 미쓰히데는 야마자키 전투(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에게 패배해 도망치다 마을사람들의 '무사사냥'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케치 미쓰히데가 죽지 않은 것은 아닌가? 라는 '아케치 미쓰히데 생존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이 생존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에도 초기의 승려로, 막부의 종교 행사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의 삼대에 걸쳐서 시중들었던 덴카이 소조(天海僧正)가 아케치 미쓰히데라는 설입니다. 다른 설은, 오구리스(小栗..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쵸쇼카베 모토치카, 하시바 군을 물리치다 사누키 평정 일본 전국시대;쵸쇼카베 모토치카, 하시바 군을 물리치다사누키 평정 덴쇼 11년(1583년) 쵸쇼카베 모토치카가 사누키 히키다효(引田表)에서 하시바 히데요시 측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물리쳤습니다. 덴쇼(연호) 11년(1583년) 4월 21일은 시바타 가쓰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의 사이에 행해진 시즈가타케 전투(시즈가타케 전투)가 있었지요. 이 때 그날, 시고쿠의 히키다효에서는 다른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덴쇼 3년(1575년) 7월의 시만토가와 전투에 승리해, 토사를 통일한 쵸쇼카베 모토치카는 나머지 시고쿠의 영주들이 모리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노부나가의 측근 중 한명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 사이토 토시미쯔(斉藤利三)의 여동생과 모토치카가 결혼을 하기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즈마스, 패퇴하다 간나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가즈마스, 패퇴하다 간나가와 전투 덴쇼 10년(1582년) 6월 18일,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알아 상경을 시도하는 다키가와 가즈마스와 이 기회에 우에노를 강탈하려고 하는 호조 우지마사가 간나가와(神流川)에서 격돌했습니다. 덴쇼 10년의 3월에 다케다 가쓰요리를 할복시킨 오다 노부나가(다케다가 멸망하다) 노부나가는 우에노 우마야바시성(厩橋城)을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지키게 해 구 다케다의 영지를 맡깁니다. 고슈(甲州)의 위협이 없어진 노부나가는 이제 에치고의 우에스기의 세력권내에 있는 호쿠리쿠 제패를 향해서 힘을 쏟습니다. 선대의 우에스기 겐신의 죽음으로 인해 일어난 후계자 분쟁 오타테의 란(오타테의 란)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서서히 북으로 진공하여 간 오다군 호쿠리쿠 정벌군의 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8) 이야에스, 서둘러 미카와로 돌아가다 이가코에 일본 전국시대;혼노지의 변(8) 이야에스, 서둘러 미카와로 돌아가다 이가코에 '혼노지의 변'의 충격적인 소식은 점차 전국으로 퍼져갑니다. 전날 우오츠성을 점령한(우오츠성 공방전) 시바타 가쓰이에와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노부나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이틀 뒤인 6월 4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호쿠리쿠 담당 부문의 무장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상경한다는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있던 장소는 노부나가의 세력권의 최전선인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부나가 사망의 소식을 들은 적은 사기가 충전하여 오다군을 토벌하려 하지요. 이런 상황은 우에노의 다키가와 가즈마스나, 시나노의 모리 나가요시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가즈마스는 1만 8천의 군사를 인솔해 우마야바시성(厩橋城)을 나와 상경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7); 노부나가의 시체는 어디있는가?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7); 노부나가의 시체는 어디있는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는 혼간지의 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가슴에 총탄을 맞았으므로 할복 자살했다고 하는 사람도, 저택에 불을 질러 불에 타 숨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화재가 컸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노부나가기信長記」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목을 찾았지만 전혀 발견되지 않고, 미쓰히데가 많이 수상하게 여겼지만, 유해 같은 것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또, 「대자원구기록大慈院旧記」에는, 이세의 호시아이성(星合城) 주 호시아이 노리후사(星合教房)의 아내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아내가 교토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히노 언덕(日ノ岡)에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5)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미쓰히데 결백설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5)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미쓰히데 결백설 혼노지의 변은 단 하루의 사건이지만 전국시대는 이 사건에 이전과 이후로 바뀌는 데다 의문점이 상당히 많은 사건이지요. 오다 노부나가는 사실 죽지 않았다는 설부터 이야에스가 진범이라는 설, 히데요시가 진범이라는 설도 있는데, 오늘은 아케치 미쓰히데가 범인이 아닌게 아닌가? 하는 설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혼노지의 변에서 나온 속담「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라는 말은 에도시대에 쓰여진 「카와스미 다이코키川角太閤記」가 최초로 정작 혼노지의 변에는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번의 마쓰히데 군의 진정한 목적이 노부나가 토벌인 것도 아케치 미쓰히데의 매우 일부의 중신만이 알고 있었다고 하나, 정말인지는 모르지요. 즉, 아케치 미쓰히데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노지의 변(4) 범인은 누구인가? 히데요시 흑막설 일본 전국시대;혼노지의 변(4)범인은 누구인가? 히데요시 흑막설 혼노지의 변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노부나가가 반죽해논 것을 떡으로 만든 히데요시입니다. 게다가 츄고쿠로의 원군을 요청한 것도 다름아닌 히데요시이지요.(타카마츠성 공방전) 만약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에 요청하지 않았으면 노부나가는 그대로 아즈치성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혼노지의 변은 일어날 수 없었겠지요. 이 히데요시의 원군 요청에 대해서는, '빗츄 타카마츠성에의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모리의 대군이 지원하러 온다는 정보가 있어, 그렇게 되면 형세가 역전할 가능성도 있기에'보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아무튼 히데요시로부터의 그 편지가, 아즈찌에 닿은 것이 5월 15일 입니다. 그리고, 타카마츠성을 구하기 위해, 깃카와 모.. 더보기
혼노지의 변(3) 범인은 누구인가? 이야에스 흑막설 일본 전국시대;혼노지의 변(3) 범인은 누구인가? 이야에스 흑막설 덴쇼 10년 6월 2일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할복하고 맙니다. 반노부나가 포위망을 찟고, 전국 통일을 눈 앞에 둔 노부나가는 서쪽의 모리를 토벌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가, 6월 4일 출진을 예정하고 선봉으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저번에 썼듯이,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고 맙니다. 혼노지의 변이 왜 일어났는가?(혼노지의 변의 서막이 오르다), 그리고 그 경과(전국시대의 풍운아, 혼노지에서)에 대해서 썼다면 오늘은 흑막설에 집중해 범인을 찾아 보겠습니다. 덴쇼 10년(1582년) 5월 30일, 교토에서 사카이로 이동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카이의 항구를 유람 하는 등 사카이 관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반달전 이야에스는 아즈치성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