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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말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8) 아츠하지산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8) 아츠하지산 전투 분지 5년(1189년) 8월 10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오슈 원정군이 아츠하지산 전투(阿津賀志山の戦い)에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군을 격파했습니다. 분지 3년(1187년) 히데히라가 죽어 오슈 후지와라가 쇠락해 가자, 분지 4년(1188년) 2월 21일 재차 요리토모에게 '요시츠네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선지가 내려져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갈등에 휩싸입니다. 구심점이 없어져 쇠락한 오슈 후지와라 가문은 '계속 요시츠네를 보호하자'라는 파와 '덴노의 명을 받아 요시츠네를 토벌하자는 파'가 나뉘었습니다. 결국 히데히라를 이은 야스히라는 반대파인 남동생을 죽이고 요시츠네 토벌의 선지를 받들어 코모로가와 근처의 그의 집에..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시츠네, 오슈의 히데히라에게 도망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시츠네, 오슈의 히데히라에게 도망치다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형 요시토모에게 쫓겨난 요시츠네가 오슈 히라이즈미(平泉)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로 도망쳤습니다. 헤이안 시대 오슈를 지배한 후지와라 가문은 중앙 정계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그 기반을 철저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3대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36세로 가독을 상속합니다. 토호쿠의 지배자가 된 그는 조정에서 무츠노카미(陸奥守)로 제수되었긴 하지만 조정과는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풍부한 산물이 아닌 오슈에다 여러 교역으로 인해 부를 쌓아올린 히데히라는 오슈 17만기라고 하는 군사력과 교토와 비견할 만한 수도를 쌓아 올려, 독립국가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쇼안 4년(1174년), 황금으로 재산을 쌓은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주에이 2년(1183년) 5월 9일, 호쿠리쿠에 쳐들어온 타이라 군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 군의 선발대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의 군세가 한야노에서 격돌한 '한야노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7)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방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7)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방문 지쇼4년(1180년) 10월 6일,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재흥을 위해 가마쿠라에 들어가,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크게 보기가마쿠라의 위치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서, 이즈의 하루카고시마(蛭ヶ小島)에서 유배중이던 요리토모는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발한 타이라 토벌의 영지(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하다)를 받아 군사를 일으켜 지쇼 4년 8월 17일에는, 야마키 저택을 성공적으로 야습해 출진을 장식하나, 계속 된 이시바시산 전투(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져서 산중을 도망다니다, 마나쯔루미사키(真鶴岬)에서 어떻게든 작은 배를 타고, 무사 사냥의 포위망에서 겨우 탈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