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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강화가 찢어지다, 오카사 여름의 진 서막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강화가 찢어지다, 오카사 여름의 진 서막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4월 19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오노 하루즈미(大野治純)에게 형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의 상황을 묻게 했습니다.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은 오사카 여름의 진이 있던 해입니다. 세키가하라에서 반대 세력을 일소 해 거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222만석이었던 영지를 셋츠, 카와치, 이즈미의 65.7 만석으로 감봉 되어 일개 다이묘가 되어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마무리한 인상이 강한 전투입니다만, 실제로는 도요토미의 세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저번에 써 본적이 있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19일, 오오사카 겨울의 진의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8) 반단 에몬의 야습과 천수각 피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8) 반단 에몬의 야습과 천수각 피탄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16일,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도요토미 측의 반단 에몬(塙団右衛門)이 도쿠가와분의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부대를 야습해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나카무라 우콘(中村右近)을 죽였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4일, 최초부터 도요토미측이 불리했던 오사카 겨울의 진 중에서, 유일하게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에게 압승한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던 날입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게이쵸 19년(161..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5)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5)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9일, 오오사카동의 진의 야전,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6일,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최대의 격전이 된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鴫野, 今福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3) 결전을 앞둔 오사카성의 모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3) 결전을 앞둔 오사카성의 모습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5일, 오사카 측의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가 도쿠가와측 마쓰다이라 타카아키(松平忠明), 혼다 타다마사(本多忠政)에게 습격을 받아, 결전을 피해 오사카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서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뒤, 쿠도산(九度山)에 추방되고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탈출해 오사카성으로 향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반나절만에 결착납니다. 하지만 이때,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로 향한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유키, 유키무라 부자 3명입니다만, 시모우치 이누부시의 숙소에서 미쓰나리의 밀서를 받은 뒤에, 형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붙어 그대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합류하고,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유키무라는 서군에 붙어 거성인 시나노 우에다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오야마에서 회군한 이야에스의 동군 중, 히데타다는 나카센도우에서 서쪽으로 향해 진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년(1611년)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