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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2) 스노마타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2) 스노마타가와 전투 지쇼5년(1181년) 3월 16일, 겐페이 전투에서 얼마 안되는 타이라의 대 승리인 전투 스노마타가와 전투(墨俣川の合戦)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이로인해 후쿠하라로 천도했던 키요모리는 다시 수도를 헤이안쿄로 재천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동국의 무장들은 '타이라 가문이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는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8) 후지가와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8) 후지가와 전투 지쇼4년(1180년) 10월 20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인솔하는 미나모토 군과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가 인솔하는 타이라 군의 맞붙은 후지가와 전투(富士川合戦)가 있었습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자랑하는 타이라 가문 아래에서 불우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모치히토왕(以仁王)이, 지쇼4년(1180년) 4월에 발한 타이라 토벌의 영지(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내립니다. 덴노도 아닌 일개 황태자가 낸 영지는 원래대로라면 별 효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쇼 삼년의 변으로 기능이 마비된데다 타이라 가문이 옹립한 덴노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지쇼 삼년의 변) 즉, 반 타이라 세력에게 모치히토왕의 영지는 좋은 명분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6) 이치하라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6) 이치하라 전투 지쇼4년(1180년) 9월 7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이치하라 전투로 첫 출진을 장식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 키소의 나카하라노 카네토오(中原兼遠)에게 몸을 의지한 쿠왕(駒王)은 일족의 따뜻한 비호 아래, 무럭 무럭성장해, 원복한 뒤 키소노 지로우 요시나카(木曽次郎義仲)라고 자칭했습니다. 이 지쇼4년(1180년) 5월에, 요시나카에게도, 모치히토왕(以仁王)의 영지가 도착했습니다.(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모치히토왕은 우지바시 전투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졌습니다.(우지바시 전투) 이윽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8월 17일에 야마키 저택을 기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들은(요리토모 발기) 요시나카..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시시가타니의 음모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시시가타니의 음모 지쇼 원년(1177년) 5월 29일, 타카히로(俊寛)의 산장에서 행해지고 있던 타이라 가문 타도 집회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출석해 후에 '시시가타니의 음모'라고 칭해지는 회합이 열렸습니다. 원래 닌안2년(1167년)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급작스런 승진으로 태정관으로 취임(키요모리의 태정관 취임) 하고 나서는 그 힘은 더욱 커져, 교토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르고, 붉은 줄을 드리운 '카부로(禿童)'라고 불리는 15~16세의 소년들 300명 정도가 돌아다니며 타이라 가문에 반발하는 사람이나 욕을 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토 도처를 걸어 다니며, 반발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저택에 침입해 재산을 몰수하고 욕한 본인을 잡아 로쿠하라(六波羅)에 인도한..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할복, 류구왕 전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다메토모 할복, 류구왕 전설 닌안 2년(1170년) 3월 6일, 호겐의 난에 깨지고 이즈오오시마에 흘러가고 있던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할복 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 첫 할복 자살이라고 합니다. 덴노가문의 황위와 권력을 둘러싼 분쟁에 후지와라, 타이라, 미나모토 가문도 갈려서 싸우게 됩니다. 이 호겐의 난(호겐의 난)에서 야습을 결행한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3,000이나 되는 군세에 대항하는 스토쿠 덴노 세력은 고작 200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이때 스토쿠덴노 측에서 분전한 맹장이 바로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에게 의절되어 큐슈에 유배당했습니다. 그런데, 큐슈에서 자신의 땅을 지배하던 호족들을 토벌한 맹장입니다. 그의 힘을 무서워한 조정이 아버..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닌안 2년(1167년) 2월 11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사다이진(左大臣), 우다이진(右大臣)을 역임하고, 벼락출세 해 태정관(太政大臣)에 올랐습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헤이안 시대 마지막에 귀족이 아니고, 무사 최초로 정권을 잡아, 헤이케 전성 시대의 기반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의 적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출세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례중의 이례로,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나 「미나모토 타이라 성쇠기(源平盛衰記)」에서는 재밌게도 키요모리 사생아설이 나와 있습니다. 키요모리는 12세에 종오위에 제수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인 타다모리는 종사위로, 아무리 아버지의 위광이 있었다고 해도 있을 수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연표; 헤이안 시대 후기, 겐페이 쟁란의 연표 일본 헤이안시대 연표;헤이안 시대 후기, 겐페이 쟁란의 연표 헤이안 시대 말기, 혼란이 찾아와 무사들이 힘을 얻고 일본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겐페이 쟁란(源平争乱)이 있었습니다. 연호 년도 일자 사건 호겐 1156년 7월 2일 토바덴노 사망 7월 11일 호겐의 난 발발 헤이지 1159년 12월 9일 헤이지의 난 발발 12월 26일 헤이지의 난 종결 1160년 1월 4일 미나모토노 요시모토가 욕실에서 암살당하다 쵸칸 1164년 8월 26일 스도쿠덴노 사망, 최악의 원령전설 닌안 1167년 2월 11일 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3월 6일 미나모토노 다메토모 할복, 류구왕 전설 지쇼 1177년 5월 29일 시시가타니의 음모 1179년 3월 2일 겐페이 쟁란의 개막, 지쇼 삼년의 정변 1180..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시모토 욕탕에서 암살당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미나모토노 요시모토 욕탕에서 암살당하다 헤이지2년(1160년) 1월 4일, 앞의 헤이지의 란에서 패배했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오와리국 노마에서 모살되었습니다. 카와치 겐지(河内源)의 동량인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의 장남인 요시토모(義朝)는 아버지가 교토에서 조정의 용병으로서 활약하는 가운데, 대대로 계승한 영지인 사가미국 가마쿠라에서 자랍니다. 여기를 거점으로 겐지 대대로 이어온 유서 깊은 호족들을 따르게 해 그가 20대가 되자, 칸토 남부 일대에, 큰 세력을 가지기까지 됩니다. 그가 기나이에서 멀어진 것은, 아버지 타메요시와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아, 의절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본거지를 떠나고 교토에 있는 일이 많은 아버지 대신 현지 관동을 지배하고 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