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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야마 혼간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격돌! 텐노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 격돌! 텐노지 전투 덴쇼 4년(1576년) 이시야마혼간지를 포위한 오다 노부나가 군의 성채를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인 텐노지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결별한 제15대 무로마치 막부 쇼군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으로,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신겐등의 무장에 의해서 형성 된 노부나가 포위망에는 제11대 혼간지 법주 켄뇨(顕如)가 더해져, 전국에 잇코우 잇키를 일으키며 오다를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오사카성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이시야마 혼간지는 이런 잇코우 잇키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혼간지와 노부나가와의 전투인 이시야마 전투는, 겐키 원년(1570년)부터 덴쇼 8년(1580년)까지 11년에 걸쳐서 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반목, 제 1차 이시야마전투의 발발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혼간지와 노부나가의 반목, 제 1차 이시야마전투의 발발 겐키 원년(1570년) 이시야마 혼간지가 노다, 후쿠시마의 성채에 공격을 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 군사를 일으켰으니,이것이 바로 제 1차 이시야마 전투입니다. 노부나가는 '제육천마왕'등 종교를 탄압했다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런데 사실 노부나가 전의 종교세력은 민중의 마음을 잡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정치에 강하게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중들은 무장해서 승병이 되어, 정신적으로만 힘을 가진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노부나가가 한 것은 종교를 정치에 개입시키지 않는 정교 분리였지 종교 탄압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쫓겨난 혼간지는 갈수록 무장들과 료닌(방황무사)들을 받아들여 이 즈음에는 중앙 권력과도 깊은 연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도쿠카와 이야에스의 미카와 잇코우잇키 진압 일본 전국시대; 도쿠카와 이야에스의 미카와 잇코우잇키 진압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 잇코우 잇키에 참가하고 있던 나츠메 요시노부(夏目吉信)가 이에야스 측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잇코우 잇키를 평정하려 나섭니다. 미카와 잇코우 잇키라고 하는 것은, 당시 , 조동종(曹洞宗)의 세력이 강했던 미카와 동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혼쇼지(本證寺)의 소라세이(空誓)를 중심으로 영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저항한 약 반년간의 잇코우잇키입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 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에노미야지(上宮寺)의 경내에 토쿠가와의 분사를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설과(이 설이 정설입니다) 혼쇼지에 도망친 건달을 도쿠가와의 가신이 허락을 받지 않고 포획 했기 때문에이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아무튼 도쿠가와측..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아라키 무라시게, 아리오카성에서 반기를 들다 일본 전국시대;아라키 무라시게, 아리오카성에서 반기를 들다 덴쇼 14년(1586년), 토시야스 칠철(利休七哲)의 한 명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만큼 전국시대에서 독특한 처세술을 선택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주군 이케다(池田)가의 내분을 이용해, 이케다 가츠마사(池田勝政)를 코노야마에 추방하고 이케다가를 빼앗습니다. 그 후, 이케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다(和田)가와 이타미(伊丹)가를 멸하고 셋츠를 통일해 일개 무장에서 다이묘가 됩니다. 마치 사이토 도산을 방불 시키는 하극상을 이룬 그를 오다 노부나가는 장인 생각이 났는지 마음에 들어 해 무라시게를 특별 대우로 스스로의 산하에 맞아들입니다. 무라시게는 겐키 원년(1570년)에 발발한 이시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