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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슈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리토모,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하다 분지 5년(1189) 6월 25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습니다. 선지는 덴노 혹은 거기에 준하는 사람의 명령서입니다. 선지가 있으면 그 행위는 정통으로 관군으로 간주해지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던지 상대를 죽이던지 죄를 추궁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요리토모는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추토의 선지를 유구합니다.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지배하는 오슈는 원래 미나모토의 영지로 '후 삼년의 역'으로 빼았긴 땅입니다. 이제 그는 이 땅을 되찾으려 합니다. 교토로 들어와 타이라를 토벌한 요시츠네와 요리토모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요시츠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요구해, 이를 받..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요시츠네, 오슈의 히데히라에게 도망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요시츠네, 오슈의 히데히라에게 도망치다 분지 3년(1187년) 2월 10일, 형 요시토모에게 쫓겨난 요시츠네가 오슈 히라이즈미(平泉)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에게로 도망쳤습니다. 헤이안 시대 오슈를 지배한 후지와라 가문은 중앙 정계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그 기반을 철저히 다지고 있었습니다. 3대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36세로 가독을 상속합니다. 토호쿠의 지배자가 된 그는 조정에서 무츠노카미(陸奥守)로 제수되었긴 하지만 조정과는 구별된 존재였습니다. 풍부한 산물이 아닌 오슈에다 여러 교역으로 인해 부를 쌓아올린 히데히라는 오슈 17만기라고 하는 군사력과 교토와 비견할 만한 수도를 쌓아 올려, 독립국가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쇼안 4년(1174년), 황금으로 재산을 쌓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복수 시도, 히토토리바시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 복수 시도, 히토토리바시 전투 덴쇼 13년(1585년) 11월 17일, 아버지의 애도를 하는 전투로 다테 마사무네와 하타케야마, 사타케, 아시나의 연합군이 세토가와(瀬戸川)에 가설된 히토토리바시(다리)에서 펼친 싸움 '히토토리바시 전투(人取橋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슈의 패왕이 되는,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한쪽 눈을 실명한 뒤에, 모친에게 버림 받아(요시히메) 위기에 빠졌었습니다. 명승 코사이 소우이쯔(虎哉宗乙)에게 도움을 받아 버틴 그는 15세에 첫 출진을 해, 다테의 옛 영토를 되찾습니다. 이때, 기나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할복 해(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를 하시바 히데요시가 토벌한 야마자키의 전투(야마자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마사무네의 영토확장, 스리아게하라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마사무네의 영토확장, 스리아게하라 전투 덴쇼 17년(1589년) 6월 5일, 다테 마사무네가 무츠 아이즈의 아시나 모리시게(芦名盛重)를 물리친 스리아게하라 전투(摺上原の戦い)가 있었습니다. 파죽지세로 무츠, 데와의 평정을 하던 젊은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히토토리바시 전투)는 덴쇼17년의 초 봄에 모가미, 오사키 가문과 강화에 성공해, 4월에는 소우마 가문에 공격을 시작 합니다. 이 행동에 불안을 가지게 된 것이 무츠 아이즈의 아시나 모리시게(芦名盛重)입니다. 모리시게는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와 결탁해 다테를 공격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정보가 마사무네의 귀에 들어갑니다. 마사무네가 이미 아시나의 중신 이나와시로 모리쿠니(猪苗代盛国)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슈의 휘몰아치는 혼란, 쿠노헤의 난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슈의 휘몰아치는 혼란, 쿠노헤의 난 덴쇼19년(1591년) 9월 4일, 이 해의 3월 경에 발발한 '쿠노헤의 난(九戸の乱)'으로 쿠노헤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쿠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장에 포위되어 항복 했습니다. 오다와라 정벌(오다와라 정벌)은 오다와라성 함락(오다와라성 함락)으로 끝났습니다. 이것으로 호조를 멸망시켜 버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오슈 정벌'로 향합니다. 정벌이라 해도 실제로 전투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오다와라성을 정벌할 때 참가하지 않은 무장의 영지를 참가한 무장에게 수여한 것이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 역시 늦게 참전한데다 히데요시와 친분이 있던 이시나가문을 멸했기 때문에 영지의 대부분을 빼앗깁니다. 여하튼 이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히데요시를 배반? 카사이, 오사키 잇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 마사무네, 히데요시를 배반? 카사이, 오사키 잇키 덴쇼 18년(1590년) 11월 2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정벌에 반발해 10월 무렵에 발발하고 있던 카사이(葛西), 오사키(大崎) 잇키로, 잇키 세력에 포위되어 고립상태로 농성하던 사누마성(佐沼城)의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 키요히사(清久) 부자가 구출되었습니다. 덴쇼 18년(1590년)의 3월 말, 호조의 오다와라성 정벌에(오다와라 정벌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산하에 들어오지 않은 토호쿠의 여러 무장에게, 오다와라 공격에 참전하도록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3개월에 걸치는 싸움의 끝인 7월 5일에 오다와라성이 함락 된 후 호조 우지마사가 할복, 아들 우지나오가 코노야마에 들어가, 사실상 호조는 멸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