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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고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츠네히사의 명운과 함께하다, 아마고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츠네히사의 명운과 함께하다, 아마고 가문 아마고 가문의 성립 아마고 가문은 오미 수호인 쿄고쿠(京極) 가문의 일족으로 아마고 마을에 살며 '아마고'를 자칭하게 된 것이 그 시조입니다. 모치히사(持久)가 이즈모 수호대를 제수 받으며 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갓산토다성(月山富田城)을 거점으로 잡은 아마고 가문은 때마침 일어난 오닌의 난(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섭니다. 당시 이즈모에 인접한 호우키, 아와미가 모두 서군의 대장 야마나의 분국이었기에, 아마고 가문은 종횡하며 전국의 거센 바람에 맞서게 됩니다. 아마고 츠네히사가 이끈 아마고의 중흥 그 뒤를 잇는 것이 다름아닌 아마고 츠네히사(経久)입니다. ' 전국 3효웅'에 꼽힐 정도로 대단했던 츠네히사는 아마고 가문을 일약 센고쿠 다이묘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1) 사슴과 늑대의 사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1) 사슴과 늑대의 사투 에이로쿠9년(1566년) 갓산토다성을 포위중인 모리 모토나리가 항복을 신청한 아마고 요시히사의 생명을 보전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쿠니진에서 어느덧 전국 다이묘로 발을 내딛고 있는 모리가, 이번에는 아마고가를 목표로 정합니다. 전국 굴지의 책략가 모토나리는 먼저 이와미 은광을 점령해 자금줄을 끊고(이와미 은광 쟁탈전), 하쿠로쿠성을 점령해(하쿠로쿠성 공방전) 주위의 성들을 손에 넣습니다. 이제 고립된 갓산토다성을 모토나리는 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포위합니다. 에이로쿠8년 처음으로 출진한 모토나리의 손자 테루모토(輝元), 모토하루(元春)와 차남 모토하루(元長)의 아들 킷카와 모토나가(吉川元長)가 합류해 이 전투의 주역이 모두 모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 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2) 아마고가의 멸망과 재흥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 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2) 아마고가의 멸망과 재흥 에이로쿠9년(1566년) 아마고가가 갓산토다성을 모리군에 포위되어 결국 항복을 표명했습니다. 아마코 하루히사는 산인(山陰) 8개국을 지배하는 대영주였지만, 하루히사 만년에 동족의 대립에 의해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이쓰쿠시마 전투의 서막) 모리가에서 이 분란을 획책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든 이렇게 혼란에 빠진 아마고를 가만이 놔둘 모리가 아닙니다.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가의 영지에 진공하기 시작합니다. 하루히사는 필사적으로 응전하지만 이미 기세를 탄 모토나리, 게다가 모리는 대립하고 있던 큐슈의 오오토모와도 화해해 총 전력을 대 아마고가에 쏟아 붓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루히사가 급사하고 뒤를 이은 아들 요시히사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모토나리, 아마고가의 방어선을 뚫다; 하쿠로쿠성 공방전 에이로쿠6년(1563년) 모리 모토나리가,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함께, 아마고가의 이즈모(出雲) 하쿠로쿠성(白鹿城)에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와미 은광을 탈취한 모토나리는(이와미 은광 쟁탈전) 드디어, 아마고가의 이츠모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엔로쿠5년(1562년) 차남 깃카와 모토하루,삼남 고바야카 다카카게와 함께 총원 1만 5,000의 군사를 인솔한 모토나리는 이와미를 경유해 이즈모로 들어옵니다. 이 행동만으로 많은 이즈모의 쿠니진들이 시원스럽레 아마고를 단념해 모리의 산하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아라와이(洗合)에 도착한 모토나리는 츠케시로을 구축합니다. 동시에 아마고의 본거지 갓산토다성을 견제하기 위해, 거기에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아마고가 쇠퇴의 분기, 이와미 은광 쟁탈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아마고가 쇠퇴의 분기, 이와미 은광 쟁탈전 에이로쿠 3년(1560년) 이즈모의 전국 다이묘 아마고 하루히사(尼子晴久)가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즈모 지방을 차지한 아마고가가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지듯 멸망으로 향하는 분기점이 바로 이 하루히사씨의 죽음입니다. 뒤를 이은 아마코 요시히사가 결코 선대와 비교해서 특별히 무능했다고 하는 것은 아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주위의 환경의 변화가 그의 죽음과 함께 닥쳐왔습니다. 가마쿠라 때부터 츄고쿠 지방에 군림한 두개의 큰 세력은 스오우의 오오우치가와 이즈모의 아마고가였습니다.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일본의 이와미(石見) 은광은 그 가마쿠라 시대에 발견된 이래 귀중한 자금원으로서 이 두세력의 사이에서 쟁탈전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쓰쿠시마 전투(5) 모리군의 추격과 다카카게의 분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쓰쿠시마 전투(5) 모리군의 추격과 다카카게의 분전 코우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로, 스에 하루카타의 맹장 히로나카 타카카게가 전사 했습니다. 주군이 할복하고 군세가 이지러지는 상황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것이, 하루카타의 용장 히로나카 타카카게였습니다. 타카카게가는 키요카즈 겐지의 유파를 이어받는 명가였고,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가 멸망한 뒤에 대대로 이와쿠니의 영주를 맡아 오오우치가의 가신들 중에서도 중심적 존재의 가계였습니다. 오오우치가의 제30대 당주 오오우치 요시오키와 그 아들 요시타카의 2대를 시중들고 있던 타카카게는 오오우치가의 신하가 된 모리가를 구하기 위한 안쇼우성 전투에서도 대활약했으며 오오우치가의 라이벌인 아마고가와의 일련의 항쟁에서는 모토나리와 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아마고가의 멸망, 2차 코우즈키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아마고가의 멸망, 2차 코우즈키성 공방전 덴쇼 6년(1578년) 모리군에 포위된 코우즈키성에서 농성 하고 있던 아마코 가쓰히사(尼子勝久)가 할복 해, 산인에 기반을 두었던 아마고가가 멸망 했습니다. 남북조 시대에 활약한 사사키 도우요(佐々木道誉)를 선조로 이즈모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아마고가는 에이로쿠9년(1556년)에 아키의 모리 모토나리에 공격받아 멸망 해버립니다. 그러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은 굴하지 않습니다. 그는, 16세에 첫 출진 할 때에 다음과 같이 초생달에 맹새했다고 유명한 아마고 십용사 중 한 명입니다. 願わくば我に七難八苦を与えたまえ원컨데 나에게 칠난팔고를 주기를 그는 마치 오뚜기와 같이 아마고가를 위해 일어납니다. 모리의 포로가 되었을 때도, 설사를 핑계로 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이쓰쿠시마 전투(1) 이쓰쿠시마 전투의 서막 일본 전국시대;이쓰쿠시마 전투(1) 이쓰쿠시마 전투의 서막 코우지 원년(1555년) 스에 하루카타(陶晴賢)측의 카미료쥬(神領衆)들이 아키 오가타, 오오타케에서 작은 배 7~80척에 나눠 타고 모리 모토나리측의 이쓰쿠시마(厳島)를 공격했습니다. 전국시대 스오우의 오오우치가와 이즈모의 아마고가가 격전을 벌이고 있던 츄고쿠 지방에 모리 모토나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오우치가의 중신인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켜 실권을 잡습니다. 이 때 스에측에 서서 함께 오오우치가를 공격해 세력을 확대한 모토나리였지만 실은 고쿠진이었던 자신을 등용해준 요시타카에 약간이나마 은의를 느끼고 있어 마음 속에서는 이 모반을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재빨리 오오우치가의 가신단을 장악 하고 모반을 결행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오우치가 몰락의 서막, 다이네이지의 변 일본 전국시대;오오우치가 몰락의 서막, 다이네이지의 변 텐몬 20년(1551년) 스오우의 전국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陶隆房)가 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다이네이지(大寧寺)의 변으로 불리는 전투 입니다. 오오우치가는 백제의 임성태자(琳聖太子)의 자손입니다. 스오우의 '오오우치'를 본거지로 했기 때문에, 오오우치라고 자칭하게 됩니다. 메이토쿠 2년(1391년) 경에는 서쪽으로 세력을 늘려 대대로 오오우치가의 당주가 스오우의 수호를 맡게 됩니다. 제29대 당주인 오오우치 마사히로는 오닌의 난에서 활약하고, 제30대 당주인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관령 호소카와가의 싸움에 관여하는 등 중앙에서도 경의를 표해지는 가문이 되어 갔습니다. 교로쿠 원년(1528년)에, 그 요시오키에 이어 오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