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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고쿠시대

일본 전국시대; 오우미군에서 쇼군이 기습당하다 일본 전국시대;오우미군에서 쇼군이 기습당하다 쵸우코우 원년, 오우미군(近江鈎)에 포진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롯카쿠 타카요리(六角高頼)의 부하 코우가 타케시(甲賀武士)등이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오닌의 난이후 막부 쇼군과 여러 다이묘들은 자주 대립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에서 오미(近江)남부의 전국 다이묘 롯카쿠 다카요리는, 오미우치의 문신령이나 절, 신사령을 계속 점거합니다. 당연, 문신이나 절, 신사는 무로마치 막부 제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 호소해 요시히사도 다카요리에게 퇴거하도록 언도합니다. 하지만 아시카가 쇼군의 군사력의 실추와 하극상의 도래 그리고 전국시대의 시작을 느끼고 있던 타카요리는, 쇼군의 말을 무시합니다. 타카요리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을 안 요시히사는, 쵸우코우원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시로의 쿠니잇키 일본 전국시대;야마시로의 쿠니잇키 분메이 17년 교토 야마시로에서 쿠니잇키기 발발해 하타케야마 양군세에 3개의 요구사항을 제출했습니다. 잇키는 벌써 두개나 보았습니다. 분메이잇키(분메이 잇키 발발)와 카가 잇코우잇키(카가의 잇코우잇키)였지요. 잇키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포스팅하나를 보고 오시면 됩니다. (잇키란 무엇인가?)이 두 잇키는 모두 혼간지 세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는데요. 오늘 알아볼 쿠니잇키는 사실 시간상으론 카가의 잇코우잇키보다 3년 앞선 사건이지요. 어쨌든 이 잇키 역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그날 코후쿠지대승(興福寺大乗院) 진손(尋尊)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야마시로(山城)의 국민들 중 위로는 60세부터 아래는 15세의 사람까지 모여 집회를 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일본 전국시대;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분메이 11년(1479년), 오닌의 난( 오오닌의 난) 이후에 교토에 머물렀던 야마나 마사토요가 영토인 타지마로 돌아왔습니다. 야마나 마사토요는, 오닌의 난에서 서군의 대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손자(일설에는 아들)입니다. 동군의 대장인 호소카와 가쓰모토 사후에 그의 아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화평을 맺어, 오닌의 난을 끝낸 사람이지요. 이 오닌의 난을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대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막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오닌의 난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무렵은, 동서 양자가 활발하게 전투를 벌이면서도, 막부아래에 관령가가 있고, 그 아래에 수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요도하라의 전투 일본 전국시대;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요도하라의 전투 분메이 9년(1477년)에 제갈공명의 재래라 일컬어지는 오오타 도칸과 좌절된 자신의 야망을 위해 군세를 일으킨 나가오 가게하루, 두명의 일전인 요도하라(用土原)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애초 나가오가는 우에스기가의 집사집안이지만, 그 세력은 매우 거대했습니다. 그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우에스기가에서는 가게하루를 후계에 앉히지 않은 것이지요. 이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오오타 도칸은 이 반란의 심각성을 깨달고 우에스기 사다마사(上杉定正)와 우에스기 아키사다(上杉顕定)에게 가게하루를 회유하거나 진압하라고 진업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 코가쿠보(古河公方)를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중이었기 때문에 무시했습니다. 분메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에고타, 누마부코로 전투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에고타, 누마부코로 전투 분메이 9년(1477년)에 오오타 도칸(大田道灌)이 무사시(武蔵)지역의 유명한 토시마(豊島)형제를 멸한 에고타(江古田), 누마부코로(沼袋) 전투가 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에 거점이 있었으나, 남북조의 동란덕에 교토에서 막부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동의 지배는 쇼군의 삼남 모토아지(基氏)가 가마쿠라쿠보(鎌倉公方)를이어 관동을 지배한다는 체재가 되어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마쿠라는 독립국가의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때 가마쿠라쿠보의 오른팔인 관동 관령직은 우에스기가가 대대로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에이쿄 11년(1439년) 지나치게 독립을 지향하던 아시카가가(足利氏)에게 위협을 느낀 우에스기 노리자네(上杉憲実)는 쇼군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농민들의 국가? 카가의 잇코우잇키 일본 전국시대;농민들의 국가? 카가의 잇코우잇키 쵸우쿄우(長享) 2년(1488년) 카가에 잇코우 잇키가 일어나 수호인 토카시 마사치카를 할복하게 하였습니다.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가 전 쇼군 요시나리(義教)를 암살한 요시키치의 란을 계기로 카가의 수호대가 된 토가시가가 노리이에(教家)파와 야스타나(泰高)파로 갈려 수호직을 두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아카마츠 마사노리(赤松政則)도 참여해 이 싸움은 복잡해져만 갔습니다. 오닌의 란이 발발하고, 토가시 마사치카와 아카마츠 마사노리는 동군이, 토가시 코우치요는 서군이 되었었지요. 기억나시나요? 카가의 농민들은 후계자 분쟁에서 군비가 징수되고, 전답은 전투로 파괴되며, 남성들이 징집되었습니다. 그 불만을 그들은 속으로 삭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혼간지 렌노의 요시자키 퇴거 일본 전국시대;혼간지 렌노의 요시자키 퇴거 저번시간에 혼간지가 분메이 잇키(분메이 잇키 발발)에서 마사치카를 도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문명 7년(1475년) 렌노가 요시자키를 퇴거합니다. 혼간지를 중흥시킨 선조라 구가해지는 렌노(蓮如)는 자필의 편지를 여러 편 써서 가르침을 알기 쉽게 전달했으며, 사회적 약자와 여성을 타깃으로 해 많은 신자를 모았습니다. 혼간지는 히에이잔 엔랴쿠지(比叡山延暦寺)에서 독립되 나갔기 때문에, 엔랴쿠지의 승려들은 이를 못마땅이 여겼습니다. 결국 엔랴쿠지의 승병 150명이 혼간지를 습격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도망치전 렌노는 에츠젠의 요시자키에 자리잡은 것이지요.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지역 무사들도 혼간지를 믿기 시작했기에 이제 이들을 건드리는 것은 쉽지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카가에서 분메이 잇키 발발하다 일본 전국시대; 카가에서 분메이 잇키 발발하다 분메이 6년(1474), 카가(加賀)에 분메이 잇키가 발발합니다. 잇키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해 주세요.(잇키란 무엇인가?) 역시 오닌의 난(오닌의 난)에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카가의 수호인 토가시 마사치카(富樫政親)는 이 난에 동군으로 참여하나, 그의 동생 토가시 코우치요(富樫幸千代)는 서군으로 참가합니다. 그런데 난이 진행되는 와중에 동군의 하리마(播磨)지역 영주 아카마츠 마사노리(赤松政則)의 원조를 받은 마사치카는 카가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코우치요 일파를 축출해 버립니다. 대신, 카가의 북부 일부를 아카마츠에게 양도하지요. 마사노리는 승리를 거두고 본거지로 귀환합니다. 이 때, 코우치요가 군세를 이끌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북카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의 기구한 인생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의 기구한 인생 에이로쿠10년(156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와 오다 노부나가의 딸 토쿠히메(徳姫)가 결혼했습니다. 이들은 고작 9살로, 어린 신랑 신부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정략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 다케치요는 이에야스의 정실 쯔키야마도노(築山殿)와의 사이에 태어난 장남 노부야스(信康)입니다. 토쿠히메는, 고도쿠(五徳)라고도 불렸다는데요 우리나라의 발음으로는 '오덕'이 되어버리네요. 그 후 두 사람 모두 18세가 되는 무렵에 장녀가 탄생해 다음 해에는 차녀도 탄생합니다만, 남자 아이가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부부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토쿠히메와의 사이에 남자아이가 태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종결과 그 영향 일본 전국시대;오닌의 란의 종결과 그 영향 오닌의 란은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신은 명목상 장원을 가지고 있어 그 수입으로 먹고 살았는데, 전란에는 장원에서의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문신의 생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치죠 노리후사(一条教房)는 전 관백이였지만, 문신이었기에 오닌의 란이 발발한 이듬해 영지인 토사(土佐)로 떠납니다. 그의 저택은 타버렸고, 방대한 장원은 소실되었지요. 목숨만을 간신히 건져 나라로 피신했었습니다. 이런 그의 귀농(?)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관백까지 오른 사람이 지방으로 돌아가다니요. 조정에서도 반대한 귀족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토사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는 않으나, 지나치게 시골이였습니다. 그런데 전 관백인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