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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유럽에 다녀온 유럽소년사절단 일본 전국시대;유럽에 다녀온 유럽소년사절단 덴쇼 18년(1590년) 유럽을 방문해 로마교황에게 알현 한 '덴쇼 유럽 소년사절'이 8년 5개월만에 귀국했습니다. 덴쇼 10년(1582년) 떠나, 덴쇼 18년(1590년)에 귀국한 '덴쇼 유럽 소년사절단'. 이 기간 사이에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어, 시즈가타케의 전투에 승리한 하시바 히데요시가 태정관의 자리에 올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됩니다. 크리스트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노부나가와는 다르게 강력하게 크리스트교를 탄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소년사절단이 출발할 때와는 완전히 사회의 분위기가 바뀐 것입니다. 덴쇼 7년(1579년)에 일본을 방문한 예수회의 순찰사 발리그나노(Valignano)는 덴쇼 10년에 귀국할 즈음 일본에서의 포교 활동의 성과를 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노부나가의 학살, 제 2차 덴쇼 이가의 란 일본 전국시대;노부나가의 학살, 제 2차 덴쇼 이가의 란 덴쇼 9년(1581년) 제2차 덴쇼 이가의 란(第二次天正伊賀の乱)으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이가 공격으로, 마지막까지 남았던 카시하라성(柏原城)이 함락 당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에게는 슷파(出抜), 우에스기 겐신에게는 노키자루(軒猿)라고 닌자 집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역시 핫토리 한조(服部半蔵)를 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의 사나다 십용사도 많이 알려져 있지요. 또 호조는 후우마(風魔)가 있었습니다. 여러 닌자들의 이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해 주세요.(각 지역의 닌자의 이름)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가 닌자를 사용한 이야기는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무슨 짓이던지 필요하다면 서슴지 않는 노부나가가 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덴쇼 9년(1581년) 모리의 돗토리성(鳥取城)을 하시바 히데요시가 인솔하는 오다의 군세가 포위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 츄고쿠 지방을 공략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쇼 6년(1578년) 봄부터, 2년 가까이의 세월을 걸쳐 겨우 벳쇼 나가하루의 거성 미키성을 공략합니다.(미키성 농성전) 미키성을 공략하면서, 히데요시는 타지마나 이나바의 평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미키성이 함락당하기 직전 히데요시는 당시의 돗토리 성주였던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에 '이나바국의 영지를 보증할 테니 오다측으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야마나 토요쿠니는 오닌의 란에서 서군의 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자손입니다. 이전에는 산인의 수십국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다케다 멸망의 서곡, 타카마 카미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다케다 멸망의 서곡, 타카마카미성 공방전 덴쇼 9년(158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 부하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가 지키는 토노에(遠江), 타카마 카미성(高天神城)를 점령한 제3차 타카마 카미성 공방전이있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하도 심하게 패하여 아버지의 이름값을 못한다는 혹평을 비하지 못하는 다케다 가쓰요리지만, 사실 영지의 크기 자체만 두고 보면 가쓰요리 때가 조금 더 커졌습니다. 물론, 다케다 신겐이 물려준 강대한 군사력과 탄탄한 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겠지만 말이죠. 어쨌든 이런 가쓰요리의 영지 확대의 상징이 도토미와 스루가의 국경에 있는 타카마 카미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원래 오가사와라(小笠原氏)가의 거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인물편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 일본 전국시대 인물편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영주, 오오무라 스미타다 덴쇼 7년(1579년), 히젠의 오오무라 스미타다가 나가사키,모키를 예수회에 기탁했습니다. 비젠 시마바라의 전국 다이묘 아리마 하루즈미(有馬晴純)의 차남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가 오오무라가의 양자가 된 것은 불과 4세 때였습니다. 당시, 시마바라 반도에는 몇개의 가문이 있었지만 그 세력이 커봐야 쿠니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가만은 시마바라 반도 일대에 자랑하는 세력을 가지는 영주였기에 여러 쿠니진들은 이 아리마가에 종속되는 형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 텐몬 7년(1538년), 아리마가가 한층 더 세력 확대를 도모해 이웃나라의 오오무라가에 보낸 것이 스미타다입니다. 장래에 스미타다가 오오무라가의 당주가 되어 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아라키 무라시게, 아리오카성에서 반기를 들다 일본 전국시대;아라키 무라시게, 아리오카성에서 반기를 들다 덴쇼 14년(1586년), 토시야스 칠철(利休七哲)의 한 명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만큼 전국시대에서 독특한 처세술을 선택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주군 이케다(池田)가의 내분을 이용해, 이케다 가츠마사(池田勝政)를 코노야마에 추방하고 이케다가를 빼앗습니다. 그 후, 이케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다(和田)가와 이타미(伊丹)가를 멸하고 셋츠를 통일해 일개 무장에서 다이묘가 됩니다. 마치 사이토 도산을 방불 시키는 하극상을 이룬 그를 오다 노부나가는 장인 생각이 났는지 마음에 들어 해 무라시게를 특별 대우로 스스로의 산하에 맞아들입니다. 무라시게는 겐키 원년(1570년)에 발발한 이시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참모편; 단명한 도라에몽 참모, 만미 시게모토 일본 전국시대 참모편;단명한 도라에몽 참모, 만미 시게모토 덴쇼 6년(1578년)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에서 측근이 되 활약한 만미 시게모토(万見重元)가 아리오카성(有岡城)의 공방전에서 전사 했습니다. 시동에서 시작해 노부나가의 최측근이 되었다고 하는 만미 시게모토, 하지만 그의 기록은 죽기 전의 3년 정도 밖에 없고, 그 대부분이 이번에 쓰는 포스팅에 있는 내용으로 그 이전의 그에 대해서는 수수께끼에 휩사여 있습니다. 단지, 기록들에 아명인 센치요(仙千代)가 적혀 있는 일로 볼 때 어쩌면 꽤 어린 인물은 아닐까합니다. 그는 오다에서 사무적인 일들을 하고 있엇습니다. 시전(矢銭: 국방비)의 징수에 관한 지시를 내리거나 노부나가에게 내방한 사자의 대접을 하거나 노부나가가 좋아하는 스모 대회를 기획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카가 잇코우 잇키의 종결, 토리고에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카가 잇코우 잇키의 종결, 토리고에성 공방전 덴쇼 8년(1580년) 아직 남은 카가 잇코우 잇키의 거점 토리고에성을 시바타 가쓰이에가 함락 시켰습니다. 장장 10년에 걸쳐 전개된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전투는 한 때 우에스기 겐신이 참여하거나 모리의 수군이 진출하거나 아라키 무사시게의 반란 등으로 고생하던 노부나가지만 겐신의 사망, 철갑선의 건조, 덴노의 칙명 등으로 위기를 극복해 냅니다. 그리고 나서 덴쇼 8년 노부나가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시켜 카가의 잇코우 잇키 진압을 명하고, 가나자와고보가 점령당하며(가나자와고보 공방전) 카가와 잇코우 잇키는 일단락 됩니다. 그러나 본거지가 점령당했다고 해서 끝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여러 지역에서는 잇코우 잇키의 세력이 발호하고 있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일조한 시로와리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일조한 시로와리 덴쇼 8년(1580년) 오다 노부나가가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츠츠이가의 본성 츠츠이성(筒井城)의 철거를 명했습니다. 교토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츠츠이 준케이는 노부나가에게서 코오리야마성만을 남기고 그 이외의 다이와의 성을 철거하라는 명을 들어 본성인 츠츠이성으로 돌아옵니다. 그 뒤에 노부나가는 셋츠, 카와치에 있는 성들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준케이는 즉석에서 카와치로 향합니다. 그는 한달이 안되 성의 대부분을 철거해 코오리야마성에 돌아왔습니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은 그의 저서 「타몬인일기(多聞院日記)」에서 이 성의 철거에 대해 매우 놀라움을 표현했는데, 지금봐도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로 성의 철거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10년간의 이시야마 전투 드디어 종결하다 일본 전국시대; 10년간의 이시야마 전투 드디어 종결하다 덴쇼 8년(1580년) 혼간지 켄뇨가 퇴거한 뒤에도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교뇨(教如)가 이시야마 혼간지를 퇴거해 10년에 이르는 이시야마 전투가 종결했습니다. 제11대 법주 켄뇨의 오사카에 위치한 이시야마혼간지는 매우 거대했습니다. 고에이도우(御影堂)를 중심으로 하는 혼간지의 가람들을 일본어 코(コ)의 글자처럼 6개의 혼간지 내의 마을들이 둘러싸, 각각의 마을은 혼간지에 세금을 납입하는것 외에는 자유로운 자치 제도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어, 그 주민은 1만명을 넘는 수였다고 합니다. 천하를 노리는 노부나가에게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는 혼간지와 그 문도들은 골칫거리였지요. 게다가, 혼간지 신자에 의한 잇코우 잇키는 농민이 죽창을 든 오합지졸이 아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