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왕조사;
마라톤의 기원,마라톤 전투
그로부터 2년 뒤 화를 삭히던 다리우스 1세는 다시 한번 그리스로 진군합니다. 아테네에서 폭정으로 쫒겨난 히파이스의 안내로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 평원까지 별 방해를 받지 않고 진군에 성공합니다. 아테네는 위협을 느끼고 군사강국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폴론 제사기간에 보름달 뜨기전의 전투를 터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을 보내지 못합니다.
당시 전황도
아테네는 오직 8,000여명의 군사로 페르시아의 25,000여명의 군대와 맞딱드립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테네의 밀티아테스 장군은 공격태세를 취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의 군사배치는 보통 중앙에 주력부대를 배치하고, 날개에는 약한 부대를 배치한 뒤 돌파하는 형태였는데, 밀티아테스 장군은 반대로 날개에 주력부대를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지역에서 전투를 했기에, 산악지역에 적합한 밀집대형을 취했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평소에 평원을 정복하던대로 궁수의 공격 뒤에 기병이 출동하려고 하였지요. 또 아테네의 병사들에게 이 전투는 조국과 가족의 목숨이 걸린 것이었지만, 페르시아의 다민족 병사들에게는 이기나 마나 별 메리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자, 믿지 못할 결과가 나왔습니다. 페르시아의 궁수들이 발사한 화살은 모두 밀집한 아테네 병사들의 방패에 막혔고, 산악지방이라 기병들의 활약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의 전투대형, 팔랑크스
그나마 중앙을 손쉽게 돌파한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 군대의 날개에 있던 주력부대에 포위당해서 처참히 패퇴하고 말았지요. 페르시아 군은 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아테네의 병사는 고작 200명이 전사한 대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승리를 에우클레스가 42키로를 뛰어 전했다고 하지요. 후대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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