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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역사/역사편

페르시아 왕조사; 300의 모티브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페르시아 왕조사;

300의 모티브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다리우스 1세는 패배의 쓴맛을 맛보고 복수를 준비했으나, 그 전에 죽고맙니다. 그리고 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정복을 이어가지요. 그리고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향합니다. 그러나 군대의 규모가 너무 컸기에 진군속도는 필연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지요.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아무도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육상 부대(보병)70만, 기병은 낙타와 전차를 제외하고도 8만, 대함선 170척, 소형 함선과 수송선이 3000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틈에 아테네는 도시국가들을 연합시켜 동맹군을 조직합니다. 총사령관은 군사강국인 스파르타가, 참모는 아테네의 데미스토클레스가 담당하였죠. 그리고 스파르타의 왕 레오다니스가 육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육군을 저지하고 아테네의 해군이 페르시아의 해군을 막겠다는 작전을 세웠지요.



테르모필라이 전투



페르시아의 군대는 아테네의 군대를 질풍노도의 기세로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가 없었지만, 이번에도 아테네의 배신자가 페르시아 군대를 안내해 후방에서 그리스 군대를 공격해 승리를 거둡니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결사대 300명과 레오다니스왕이 죽고 말지요. 이걸 바탕으로 만든게 영화<300>이고요. 헤로도토스는 이 전투에 감명을 받아 그들을 칭송하고, 심지어는 이름도 외우고 다녔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테네 시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도망칩니다.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에 무혈입성해 불을 지르고 약탈하죠. 그러나 아직 아테네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이 남아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해군이 압도적인 수를 바탕으로 그들을 격멸하려 나서자, 아테네의 해군은 계속해서 도망가 살라미스 해협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 때 매복해 있던 갤리선들과 함께 페르시아의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스의 갤리선은 총각을 장비하고 있어서, 측면에서 부딧히기만 해도 페르시아의 배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테네의 해군은  밤이 되기 전에 퇴각합니다. 밤이 되자 폭풍우가 몰아쳤고, 전열을 정비하려던 페르시아의 해군은 거의 대부분이 수몰되고맙니다. 이 전쟁은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손꼽히곤 하지요.



살라미스 해전



그리하여 크세르크세스는 군대 대부분을 이끌고 아시아로 물러나고, 마르도니오스만 남겨 그리스 정복을 완수하게끔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그리스에 남은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격퇴당하고, 미칼레 전투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무너졌습니. 그 뒤 페르시아는 더이상 그리스 본토를 정복할 시도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 전투 후에 페르시아는 패배를 거듭한 무리한 정복전쟁의 탓으로 쇠퇴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알렉산더)에게 멸망당합니다. 한편,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맹주로서 화려한 전성기를 가지게 되지요. 그전 까지 최강국이었던 스파르타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가지고 두 도시 국가간의 불화는 점점 커져만 가니, 필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이 서서히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