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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라노 코레모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타이라 가문, 교토를 빠져 나가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타이라 가문, 교토를 빠져 나가다 주에이 2년(1183년) 7월 25일, 타이라 가문이 안토쿠덴노(安徳天皇)를 받들어 교토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호쿠리쿠 전투에서의 타이라 가문의 대패는, 교토에도 전해지고 있었습니다.(구라가타토우케 전투) 드디어 미나모토가 공격해 오는 것은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교토 내의 집들은 문뿐만 아니라, 창문도 닫고 안에서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고합니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조속히 타이라 가문을 단념하고, 24일에 고쇼(御所)를 빠져 나가 히에이잔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교토에 올 키소 요시나카(木曽義仲)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타이라 가문은 부득이 법황의 동행을 포기하고, 겐레이 몬인 토쿠코(建礼門院徳子)에 안긴 6세의 안토쿠덴노를 데..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가타토우케 전투(3) 구리가타토우케 전투 발발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구리가타토우케 전투(3) 구리가타토우케 전투 발발 지에이 2년(1183년) 5월 11일, 미나모토가 타이라를 역전하는 키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구리카라토우케(고개)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기 때문에 앞의 에츠젠, 카가 전투에서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구리카라토우케 전투(2) 한야노 전투 주에이 2년(1183년) 5월 9일, 호쿠리쿠에 쳐들어온 타이라 군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 군의 선발대 이마이 가네히라(今井兼平)의 군세가 한야노에서 격돌한 '한야노 전투'가 있었습니다. '타이라 타도'를 목표를 세우고 호쿠리쿠를 제압한 키소 요시나카에 대해,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총대장으로 10만의 대군을 인솔해 온 타이라는, 4월 26일의 에츠젠 히우치카성(燧城)을 공략하고, 5월 3일에 카가를 점령하고 엣츄를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 뉴스를 에치고에서 들은 요시나카는 타이라 군을 더 진군시켜서는 안 된다고 팜단해, 키소 사천왕의 하나인 이마이 가네히라에게 5천의 군사를 주어 선발대로 파견합니다. 한편 타이라군은 호쿠리쿠에 서투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