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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쓰쿠시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백제의 후예, 오오우치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백제의 후예, 오오우치 가문 우리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백제'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덴노가 '백제의 후손'임을 밝혔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요, 오오우치 가문은 백제 임성태자의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오오우치 가문의 성립 백제 성왕(聖王)의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일본에 문화와 불법을 전하러 가, 그곳에서 살게 됩니다. 이 자손들이 오오우치 마을에 살며, 자신들을 '오오우치'라 자칭하게 된 것이 오오우치 가문의 출자입니다. 오오우치 가문은 점차 번성해 헤이안 시대에도 그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원래 고케닌(御家人)은 아니었지만 점차 위세를 넓혀 고케닌 중 하나로 인정받기까지 합니다. 남북조의 동란에 오오우치 가문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쓰쿠시마 전투(6) 모리군의 추격, 스에 하루카타의 할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쓰쿠시마 전투(6) 모리군의 추격, 스에 하루카타의 할복 코우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의 전투가 끝나고 스에 하루카타의 주군의 신발을 관리하던 하인인 오쯔나까(乙若)가 포박 되어 모리군은 하루카타의 목을 확보했습니다. 何を惜しみ 何を恨みん 元よりも 애초에 무엇을 아까워하고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この有様に 定まれる身に이 모습이 결정된 이몸에 그는 사세구를 읊은 뒤에 할복하고, 술잔을 나눈 부하가 그의 목을 숨긴 후 할복 합니다. 아무리 승기를 잡았을 지라도, 적의 대장을 죽이거나 할복했을 경우, 그 목을 확인하지 않으면 전투는 종결되지 않습니다. 모리군은 추격을 개시하고 히로나카 타카카게부자는 분전해 전사합니다. 전투 개시부터 5 일경 산 속에 숨어있던 소년이 잡힙니다. 그의 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4) 이쓰쿠시마 급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4) 이쓰쿠시마 급습 코우지 원년(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오우의 오오우치가의 실권을 잡고있던 스에 하루카타를 넘어뜨린 이쓰쿠시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모토나리가 탄 배와 그의 군세는 충분히 서로간의 거리를 벌린채, 운명의 항해를 개시합니다. 선두의 배가, 호우포에 도착할 무렵에는 조금 바람도 잠잠해져 무사히 상륙을 끝냈을 때, 모토나리는 코다마 나리카타에게 모든 배를 가지고 돌아가도록 명합니다.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것이지요. 모토나리를 빼낼 배라도 남겨 놓자고 진언이 나왔지만, 모토나리의 결의는 단단했습니다. 한편 2 부대는 쿠마가이 노부나오(熊谷信直), 노미 무네카츠(乃美宗勝)를 선두로 세워, 예정 대로 크게 우회 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3) 누구의 원군인가?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3) 누구의 원군인가? 코우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의 싸움을 구원하려는 모리군과 무라카미의 수군 2백척이 아키 하츠카이치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원군의 소식이 없는 것에 초조해진 모토나리는 삼남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를 통해 마지막 원군 재촉을 하나, 다음날이 되어도 그들이 나타나는 기색은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하루카타에게 붙을 가능성마저 있었습니다. 이대로 미야오성이 점령당하면 꾀어낸 작전도 휴지쪼가리가 되고 단지 이쓰쿠시마가 제압되어 해안가의 성들이 모두 넘어가는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게다가 육지에서는 군사에서 이길 수 있을 전망은 적기 때문에 모토나리는 답이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원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2) 미야오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2) 미야오 공방전 코우지 원년(1555년)스에 하루카타가 대군을 인솔해 이와쿠니로부터 이쓰쿠시마에 건너, 언덕에 본진을 두고 모리측의 미야오성을 공격했습니다. 2만의 군세를 인솔하고 거점을 출발한 하루타다는 이와쿠니의 에이코우지(永興寺)에 여러 장군을 모으고 이번 모리 공격에 대해 군의를 엽니다. 용장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隆兼) 등 몇명의 무장은 육로를 선택할 것을 진언합니다. '아마 이번 미야오성은 육상의 야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원취의 고육지책이니 이쓰쿠시마를 고집하는 것은 그만둬야합니다.' 즉, 모토나리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타다는 '세토내해의 해상권을 잡으면, 해안 가의 모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