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겐페이 쟁란 썸네일형 리스트형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지쇼4년(1180년) 11월 4일, 후지가와 전투에 이어 겐페이 전투로 킨사죠 전투(金砂城の戦い)가 발발했습니다. 전년의 11월에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지쇼 3년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 하고 그의 원정을 멈춘 뒤에 법황의 신하나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버렸습니다. (지쇼 3년의 정변) 이에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다음 해의 4월에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해(타이라 토벌의 영지) 8월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깁니다.(요리토모 발기) 관동지방에서 반 타이라를 부르면서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정했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스스로의 적손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지휘..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7)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방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7)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마쿠라 방문 지쇼4년(1180년) 10월 6일,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재흥을 위해 가마쿠라에 들어가, 가마쿠라를 본거지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크게 보기가마쿠라의 위치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서, 이즈의 하루카고시마(蛭ヶ小島)에서 유배중이던 요리토모는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발한 타이라 토벌의 영지(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하다)를 받아 군사를 일으켜 지쇼 4년 8월 17일에는, 야마키 저택을 성공적으로 야습해 출진을 장식하나, 계속 된 이시바시산 전투(이시바시산 전투)에서 져서 산중을 도망다니다, 마나쯔루미사키(真鶴岬)에서 어떻게든 작은 배를 타고, 무사 사냥의 포위망에서 겨우 탈출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키..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6) 이치하라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6) 이치하라 전투 지쇼4년(1180년) 9월 7일,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이치하라 전투로 첫 출진을 장식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 키소의 나카하라노 카네토오(中原兼遠)에게 몸을 의지한 쿠왕(駒王)은 일족의 따뜻한 비호 아래, 무럭 무럭성장해, 원복한 뒤 키소노 지로우 요시나카(木曽次郎義仲)라고 자칭했습니다. 이 지쇼4년(1180년) 5월에, 요시나카에게도, 모치히토왕(以仁王)의 영지가 도착했습니다.(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모치히토왕은 우지바시 전투에서 이슬과 같이 사라졌습니다.(우지바시 전투) 이윽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8월 17일에 야마키 저택을 기습하고 승리를 거두었다고 들은(요리토모 발기) 요시나카..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5) 키메가사성 공방전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5) 키메가사성 공방전 지쇼4년(1180년) 8월 27일, 키메가사성(衣笠城) 공방전에서, 성을 점령당한 미우라의 당주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가 전사 했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 유배당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요인은 '귀족화된 타이라 가문에 대해, 반도우(坂東) 타이라라 불리는 관동의 무사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라던가, '타이라 가문 중심의 압정에 지방 무사들의 불만이 정점으로 달했다.' 라던가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일련의 겐페이 전투를 보면, 마나모토의 후계자에게 붙은 동국의 무사들이, 멸망해 가는 타이라 가문에 압승한 것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별로 승산이 없는 가운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4) 이시바시산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4) 이시바시산 전투 지쇼 4년(1180년) 8월 23일, 이시바시산(石橋山) 전투에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타이라 가문의 오오바노 가게치카(大庭景親)가 격돌했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져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를 잃은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3세 때였습니다. 그도 이 싸움에는 출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힌 이상 맏형 요시히라(義平)와 같이 목이 베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장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禅尼)가 잃은 아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요리모토를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 주면 안 되겠니'라며 키요모리에게 신신 당부해 목숨을 보전해 이즈로 유폐됩니다. 그곳에서 힘을 기른 그는 모치히토왕이 쓴 영지를 받고(모치히토왕 영지..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사를 일으키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군사를 일으키다 지쇼4년(1180년) 8월 17일, 이즈에 유폐 되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에 져 아버지 요시토모(義朝)를 잃은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3세 때였습니다. 그도 이 싸움에는 출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잡힌 이상 맏형 요시히라(義平)와 같이 목이 베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의 대장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어머니 이케노젠니(池禅尼)가 잃은 아들과 얼굴 생김새가 비슷한 요리모토를 '어떻게든 생명만은 살려 주면 안 되겠니'라며 키요모리에게 신신 당부해 목숨을 보전해 이즈로 유폐됩니다. 그 이래로 군사를 일으키는 이 지쇼4년(1180년)까지의 20년간, 그는 하루..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지쇼4년(1180년) 5월 26일, 겐페이 전투의 개막 우지바시 전투(宇治橋合戦)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 진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는 뵤됴인(平等院)에서 할복 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 '시시가타니 음모(시시가타니 음모)'로 불리는 '반 타이라'의 싹을 사전에 자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이윽고, 딸 토쿠코가 낳은 아이를 불과 3세에 안토쿠덴노(安徳天皇)로 즉위시켜, 타이라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절정기일수록 '타도 타이라'의 세력도 높아집니다. 이윽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로, 계승권은 훨씬 위에 있지만 번번히 밀린 모치히토왕(以仁王)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가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이라 토벌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지쇼4년(1180년) 4월 9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 황태자 모치히토왕이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했습니다. 헤이지 원년(1159년)의 12월에 발발한 헤이지의 란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대승리로 끝났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지고 있던 니죠 천황과 후 시라카와 법황을 구조해 낸 일로 신망을 얻은 타이라 가문은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8년 뒤 닌안 2년(1167년)에는 50세로, 태정관까지 오른 키요모리(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이때의 타이라 가문은 공경 16명, 4~5품 이상의 당상관 30명 등 에다가, 일본의 거의 절반의 수령, 궁중 경비, 제사까지 맡는 전대미문의 영화를 누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지쇼 3년(1179년) 11월 17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의 신하를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지쇼 3년의 정변(治承三年の政変)'을 결행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에 발각된 시시가타니의 음모(시시가타니의 음모)에서 '반 타이라 가문'의 기치를 올리지만, 현실을 모른채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다 실패해 버립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주모자 중 한명이었으나 훌륭히 살아남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상부상조로 서로를 돕던 고시라카와 법황과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이에 큰 도랑이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음 해 11월에 키요모리의 딸인 토쿠코(徳子)가 사내 아이를 출산합니다. 토쿠코는 당대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시시가타니의 음모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시시가타니의 음모 지쇼 원년(1177년) 5월 29일, 타카히로(俊寛)의 산장에서 행해지고 있던 타이라 가문 타도 집회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출석해 후에 '시시가타니의 음모'라고 칭해지는 회합이 열렸습니다. 원래 닌안2년(1167년)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급작스런 승진으로 태정관으로 취임(키요모리의 태정관 취임) 하고 나서는 그 힘은 더욱 커져, 교토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르고, 붉은 줄을 드리운 '카부로(禿童)'라고 불리는 15~16세의 소년들 300명 정도가 돌아다니며 타이라 가문에 반발하는 사람이나 욕을 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토 도처를 걸어 다니며, 반발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저택에 침입해 재산을 몰수하고 욕한 본인을 잡아 로쿠하라(六波羅)에 인도한.. 더보기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