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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덴노의 칙령이 내리다 덴노와 노부나가 관계는?

일본 전국시대;

덴노의 칙령이 내리다

덴노와 노부나가 관계는?



 덴쇼 6년(1578년) 말 모리 데루모토와 혼간지 켄뇨에게 오다 노부나가와 강화 하도록 오오기마치 덴노의 칙명이 내려졌습니다.


오오기마치 덴노


 이 강화의 칙명(講和の勅命)이라고 하는 것은, 겐키 원년(1570년)부터 덴쇼 8년(1580년)까지, 약 10년에 걸쳐서 전개된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이시야마 전투에 대한 강화의 칙명입니다. 아자이, 아사쿠라등 반 노부나가 동맹을 하나하나 때려잡던 노부나가였지만, 텐노지 전투이후에 참여한 모리의 수군과 노부나가에 배신한 아리오카성의 아라키 무라시게, 그리고 켄뇨의 말로 일어나는 혼간지 문도들로 인해 아직 평정을 찾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노부나가라 해도 많은 적들과 계속한 연전은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결국 노부나가는 오오기마치 덴노에게 칙명을 요청합니다.



오오기마치 덴노의 칙령



 하지만 아무리 덴노의 칙명이라 해도 노부나가의 뜻, 이시야마 혼간지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어 모리에도 칙사를 보내라고 역으로 요구합니다. 이 상황에서 제 2차 키즈가와구 해전이 발발합니다. 즉, 노부나가는 별로 전투를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의 덴노가문은 전 덴노의 장례식마저 실시할 수 없는 듯한 곤궁 상태였지요. 모리의 지원에 의해 즉위식을 치른 오오기마치 덴노는 그 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어 상경해 온 노부나가에 황실 궁궐 수리나 문신의 영지 회복, 시신전이나 청량전의 수리, 빚 반제가 곤란한 문신을 위한 법 반포등  여러가지 원조를 받습니다.


 한편 노부나가도 덴노의 보물고에 들어가거나 하는 등 덴노의 호의를 받고 있었지요. 덴쇼 9년(1581년) 오다 노부나가는 군사 시위를 하며 오오기마치 덴노에게 양위를 요구했다고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덴노와 노부나가 사이에 이렇다 할 만한 갈등도 없을 뿐더러, 문신과 덴노의 사이도 좋지 않았기에 노부나가에 의존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당시에 아이가 궁궐 위를 뛰어다닌 다느니 하는 궁중에 괴이한 일들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천변지이가 일어날 수록 덴노의 지위는 흔들립니다. 덴노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즉, 문신들이 덴노를 좋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의 노부나가의 군사시위가 일어나지요.


 물론 오오기마치 덴노는 선례가 없다며 천수를 다할 때까지 유지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전에도 덴노가 상황이 되어, 자식에게 덴노직을 물려준 경우도 있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오오기마치 덴노는 결국 노부나가 사후 천하를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에 오르고 양위를 하게 됩니다. 즉, 통념과 다르게 노부나가와 덴노의 관계가 심각하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노부나가라도 덴노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덴노는 현인신이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