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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인물편/기타

일본 전국시대 기타 인물편; 일본의 차도를 만들어낸 명인 센리큐

일본 전국시대 기타 인물편;
일본의 차도를 만들어낸 명인 센리큐


 센리큐(千利休)는 사카이(堺)에서 나야슈(納屋衆:해안에 창고를 가지고 창고업을 하던 상인)인 타나카 요효에(田中与兵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센리큐(千利休)


 젊었을 때 부터 차도(茶道)를 좋아하여, 17살 때는 키타무라 도우산(北向道陳), 그리고 타케노 죠오우(武野紹鴎)를 스승으로 두어, 함께 다도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기울입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카이를 직할지로 할 때 다도인으로 고용이 되었습니다. 혼노지의 변 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습니다. 덴쇼 13년(1585년), 히데요시가 오오기마치 덴노에게 차를 바치는데 이 때 궁중입궐을 위해 '리큐(利休)'로 제수됩니다.

 덴쇼 15년(1587년), 키타노 다도회를 주관하기까지 하며 히데요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황금 다도실, 초암 다도실을 설계하고 라쿠야키(楽焼:손으로 빚어 낮은 온도에서 구운 도기) 제작을 하는 등, 와비차(わび茶:호화스러운 다도가 아닌, 좁은 방을 다실로 쓴 간소한 다도를 말한다.)를 서서히 완성시켜 갔습니다. 히데요시가 쥬라쿠 저택을 지은 이후에는 급여를 3천석이나 받는 다도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습니다. 


센리큐 동상


 전국시대의 다도는 그냥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으로 치면 골프같은 고급 비지니스가 행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렇기에 다도를 주관하는 센리큐역시 다양한 정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오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는 히데나가에게 '조정의 일은 나에게, 비밀스런 일은 리큐에게..'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 덴쇼 19년(1591년), 리큐는 갑자기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사카이에게 은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와 리큐의 제자 후루타 시게나리(古田重然),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등이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였지만, 교토로 부름을 받고 온 리큐는 쥬라쿠 저택 안에서 할복을 명령 받습니다. 할복을 할 때 제자들이 군대를 이끌고 올까봐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군대가 저택을 지켰다고 할만큼 사랑받는 스승이었습니다. 리큐의 목은 이치죠모도리바시(一条戻橋)에 걸렸습니다.


와비차(わび茶)


 왜  히데요시는 리큐를 죽였을까요? 자신의 목상을 2층문에 세워, 그 밑으로 히데요시가 지나가게 이를 알게된 히데요시가 분노해 죽였다고도 하고, 단순히 갈등이 생겨 가두었는데 사죄나 해명을 하지 않아 히데요시가 분노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여하튼 할복한 뒤에도 쥬라쿠에 있던 그의 건물이 파괴당했다고 하니, 히데요시의 분노가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다도의 후계자는 적남 센 도우안(千道安)과 후처가 데려온 센쇼우안(千少庵)이 있지만 도우안과 쇼우안은 리큐가 죽은것과 동시에 칩거하여, 센 가문(千家)은 잠시 동안 소멸 상태가 되었었습니다. 분로쿠 4년(159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의 의해 도우안과 쇼우안은 사면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