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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히데츠구 모반죄로 할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히데츠구 모반죄로 할복



 분로쿠 4년(1595년) 7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모반의 죄에 의해 할복해 향년 28세로, 불과 4년간만 관백 자리에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 토모(とも)와 미요시 요시후사(三好吉房) 사이의 장남으로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태어났습니다. 16세에 히데요시의 가족의 한 명 시즈가타케의 전투(시즈가타케 전투)로 첫 출진이 됩니다. 다음 해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는, 히데요시를 설득해 스스로가 총대장이 되어 도전합니다만, 이야에스에게 참패하고 맙니다.(나가쿠데 전투) 히데요시의 조카이기에 직위를 얻었다는 오명을 벗어내고 싶었던 그는 오히려 오명을 거듭해 버렸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초상화



 18세가 된 히데츠구는 시고쿠 평정을 도와(모토치카 항복하다) 오미 43만석의 다이묘가 됩니다. 그리고 덴쇼 18년 (1590년)에도 23세에 오다와라 정벌에(오다와라 정벌 개시) 참가해 지성인 야마나카성(山中城)을 점령하는 활약을 합니다. 이 공적을 인정받아 오와리, 이세의 백만성을 받아, 키요스성을 거성으로 하는 대 다이묘가 됩니다. 그 이듬해, 히데요시와 요도도노(요도도노(챠챠))의 아들 츠루마츠(鶴松)가 채 3살이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립니다. 당시 히데요시는 56세로, 아이를 낳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 히데츠구를 양자로 맞이해, 그 전까지는 '미요시'를 자칭하던 그에게 '도요토미'의 성을 줍니다. 그리고 쥬라쿠에서 살게한 뒤, 관백직을 양위합니다. 그는 도요토미의 후계자가 된 것입니다.


 이윽고 분로쿠 원년(1592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출진하지 않고 교토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해, 드디어 그의 인생의 갈림길이 열립니다. 바로 요도도노가 두번째의 사내 아이를 출산합니다. 통설에 의하면, 히데요시의 친자식이 탄생한 일로, 자신의 지위에 위기감을 안은 히데츠구는 심신쇠약을 겪어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합니다. 히데츠구는 '활, 총의 연습이다'라고 하며 마을에 나와, 죄가 없는 백성들을 사살하거나 임산부를 찾아내 그 배를 갈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살생이 금지된 히에이잔에 나가 사냥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신들에게 생트집을 잡아 때리고 폭언을 하는 것은 일상다반사 였지요.



그의 운명을 바꾼, 도요토미 히데요리



 사람들은 그런 히데츠구를 무서워해 그를 '살생관백(殺生関白)'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 히데츠구의 행패는 이윽고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갑니다. 분로쿠 4년(1595년) 7월 3일 히데요시의 사자로에 쥬라쿠에 방문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히데츠구에게 힐문하고, 5일 후의 7월 8일에는 관직의 등급이 박탈되어 코노야마에 추방됩니다. 일주일 후의 분로쿠 4년(1595년) 7월 15일에 '모반'의 죄에 의해 할복 자살하게 되지요. 처음엔 분명히 '살생관백'으로 불릴만큼의 악행으로 유폐된 것인데 어느새 모반으로 둔갑한 것일까요?


 이 모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가모 히데유키(蒲生秀行)에게 내린 개역 명령을, 히데요시와 상담하지 않고 무단으로 히데츠구가 묵살했다던가, 여러 영주에게 히데요시가 아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 연판장을 돌렸다던가 여러 설이 있습니다만, 모두 증거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히데츠구와 친했던 문신 야마시나 도키쯔네(山科言経)의 일기에는 '그가 모반을 기획했다니, 있을 수 없다'라고도 쓰여져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그(히데츠구)는 노우(전통극)나 다도에도 통달하고, 고전 문학을 즐겨, 렌카를 좋아하는 풍류도 가졌다. 무엇보다 피를 보는 것을 싫어하는것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라고 합니다. 즉, 살생관백이라는 것 자체도 모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로나 하수를 정비해, 비와호와 연결되는 수로를 만들어, 상인이 자유로이 장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경제를 발전시킨 히데츠구 명군이면 명군이었지,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다스렸던 영지에 그가 폭군이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의 성격이 히데요시의 아들 출산이후 바뀌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의 주치의인 미나세 겐사쿠(直瀬玄朔)의 「의학덴쇼기(医学天正記)」에 '천식으로 인해 발작이 심해져 엎드려 잘 수 조차 없었다.'라는 것인데요. 히데요시의 아들의 탄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확실합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계획하며 히데츠구에게 '대륙을 정벌한 다음에는 지금의 덴노인 고요우세이덴노(後陽成天皇)를 중국의 지배자로 앉히고, 히데요시를 중국의 관백으로 해 주겠다'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히데츠구는 끝까지 임진왜란을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의 전투들과 실책은 혈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후에 그가 보여준 내정 정책을 보면 결코 무능하고 살상을 일삼는 이가 아닐 것 같습니다. 히데요리의 탄생 이후, 예상보다 관백의 직책을 잘 수행하던 히데츠구에게 오히려 히데요시가 공포를 안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의 할복이후, 그의 가족들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그 중에는 시집을 온지 불과 일년밖에 되지 않았던 15살의 코마히메(코마히메)도 있었습니다. 히데츠구의 진실이 무엇이던지 코마히메의 죽음은 안타깝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