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 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우에노하라 전투
코우지 3년(1557년) 가이의 다케다 신겐과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이 다시 한번 격돌한 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인 우에노하라 전투(上野原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제 2차 가와나카지마의 전투는 강화(사이카와 전투)로 끝났었지요. 이 이후 겐신은 뜬금포를 발사하고 출가를 결의하는 반면 신겐은 강화를 찢어, 시나노 북부에의 진공을 재개합니다. 게다가 겐신의 가신인 오오쿠마 토모히데(大熊朝秀)와 내통해 엣츄(越中)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오오쿠마 엣츄의 난은 신속하게 진압되고 실패에 끝납니다. 이어서 신겐은 앞의 강화의 조건으로 영지가 안도되고 있던 우에스기측의 고쿠진들에게도 반란을 종용해 겐신의 세력에 혼란을 증가시킵니다. 가족의 배반과 신겐의 선전포고에 우에스기측의 여러 장군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이윽고 신겐은, 코우지 3년(1557년) 우에스기측의 것이된 아사이야마성을 탈환합니다.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즈음 가신에게 설득되어 코노야마로부터 에치고로 돌아온 정의 오타쿠(!) 겐신은 자신의 세력을 공격한 것 보다도, 약속을 헌신짝 처럼 내버린 신겐에 격노합니다. 당장이라도 군사를 소집해 출진하려고 하려 하지만 이때는 2월의 한겨울 겨울이 험하기로 유명한 에치고에서 군세를 일으킬 수는 없었지요. 분함을 삭히며 봄을 기다리는 중에도 시나노의 고쿠진들은 차례차례로 타케다측에 합류하게 됩니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드디어 봄이오자 겐신은 카스가야마성을 출진해 주변의 지성을 차례차례로 점령하면서 가와나카지마에 다다릅니다.
이 때 우에스기측의 병력은 1만, 그에 대항하는 신겐의 병력은 2만이었습니다. 신겐은 가와나카지마로 굳이 이동하지 않고 후카시성(深志城)으로 입성 해 전열만 단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코우지 3년(1557년) 젠코우지의 키타카타 카미노하라에서 양자는 격돌했다고 합니다만, 이 전투의 자세한 사항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격돌한 장소가 우에노하라였는지, 이 전투에 신겐이 참가하고 있었는지 명백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이 날의 전투는 군신이 이끄는 군세답게 우에스기측이 약간 우세한 무승부에 끝납니다. 또다시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하지만 겐신은 이 전투를 ;길게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에 의해 위험 상황에 몰린 무로마치 막부 제 13 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봄에 개전 전에서부터 상경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이츠성(海津城)
결국 겐신은 이렇다 할만한 성과도 없이, 그해 9월에 군사를 철퇴시켜 그 다음 달에는 신겐도 군사를 물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인 우에노하라 전투가 종막을 맞이합니다. 다음 해 4월에 겐신은 상경해 '북시나노 쟁란의 평정 합내서(北信濃・争乱の平定の御内書)' 를 얻어 신겐을 토벌하는 대의명분을 얻습니다. 한편 신겐은, 최전선의 땅에 새로이 카이츠성(海津城)을 구축합니다. 서서히 이들의 운명의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절정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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