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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쓰쿠시마 전투(5) 모리군의 추격과 다카카게의 분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쓰쿠시마 전투(5) 모리군의 추격과 다카카게의 분전


코우지 원년(1555년) 이쓰쿠시마 전투로, 스에 하루카타의 맹장 히로나카 타카카게가 전사 했습니다.


 주군이 할복하고 군세가 이지러지는 상황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것이, 하루카타의 용장 히로나카 타카카게였습니다. 타카카게가는 키요카즈 겐지의 유파를 이어받는 명가였고,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가 멸망한 뒤에 대대로 이와쿠니의 영주를 맡아 오오우치가의 가신들 중에서도 중심적 존재의 가계였습니다. 오오우치가의 제30대 당주 오오우치 요시오키와 그 아들 요시타카의 2대를 시중들고 있던 타카카게는 오오우치가의 신하가 된 모리가를 구하기 위한 안쇼우성 전투에서도 대활약했으며 오오우치가의 라이벌인 아마고가와의 일련의 항쟁에서는 모토나리와 함께 싸운 전우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오오우치가의 인질이었던 모토나리의 장남 타카모토와는 나이도 비슷하고 함께 주군 요시타카의 '隆'의 글자를 받은 것으로 볼때 어쩌면, 꽤 친한 사이였다고 생각됩니다.



히로나카 타카카게



 그러나 하루카타가 요시타카를 대신해 사실상 오오우치씨의 실권을 잡게 되자 양자의 관계가 일변합니다. 이윽고, 이쓰쿠시마 전투로 도달할 때까지, 모토나리의 계략작전이 시행됬었습니다. 그 중에는 당연히 적장 중에서 가장 위협이라고 느낀 두 명을 하루카타로부터 갈라 놓으려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두 명은 바로 에라 후사히데와  히로나카 타카카게였습니다. 모토나리가 흘린 거짓 정보에 선동당한 하루카타는 타카카게에게 결백하다면 후사히데를 죽이라고 합니다. 이를 실행한 후사히데이지만, 하루카타의 의심을 지우지 못했는지 이쓰쿠시마로 출진하기 전의 군의에서 모토나리의 의도를 간파하고 육로를 고집한 그의 의견은 묵살당햇습니다.(이쓰쿠시마 전투의 서막)



이쓰쿠시마 전황도



 그는 아마 이 전황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무사의 본분으로 따라온 것 같습니다. 남동생인 카타아키라(方明)는 이와국에 남긴 채로 아들 타카스케(隆介)만을 데리고 항해해 갔습니다. 운명의 날, 그는 맨 앞에서 기습을 걸어온 깃카와 모토하루와의 격전에 돌입합니다. 과연 용장이라 이름 높은 타카카게는 혼란에 빠지면서도, 훌륭한 방어전을 펼칩니다. 하지만 그 후, 모리군 본대가 나타나 전황이 일변하자, 주위에 불을 지른 뒤에 패주 합니다. 히로나카군은 산 속으로 들어가 숲에 틀어박여 저항을 계속합니다. 타카카게를 무서워하고 있던 모토나리는 '한명도 놓치지 말아라!' 라고는 명령을 내리고, 숲을 목책으로 둘러싸고 도주를 막은 뒤에 히로나카군을 몰아넣어 갔습니다.


 모리의 군세의 맹공에 3일간 견딘 타카카게였지만 결국 모토하루의 대군에 둘러싸입니다. 그런데도 타카카게는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아 아들과 수하 한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 싸웠습니다. 최후, 아들 타카스케가 칼을 맞아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각오를 결정한 타카카게가 할복 하려 하자, 모리에 가세 하고 있던 토코노야마(鳥籠山)의 성주 아소누마 히로히데(阿曾沼広秀)의 가신 이노우에 겐몬(井上源右衛門)이 죽였습니다. 향년 34세, 맹장다운 죽음이었습니다.



끝까지 분전했던 그는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모토나리는 독특하게 이와쿠니에 남아 있던 타카카게의 동생 카타아키라의 일은 우대 해, 모리수군의 일원에 가세해 일족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모토나리도 타카카게의 무용과 지략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토나리의 명마 '햐쿠만잇신(百万一心)'은 '한사람 한사람이 힘을 합하면, 무슨 일에서도 완수할 수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만, 이 말을 이름을 붙여준 것은 타카카게였다고 합니다. 그가 만에 하나 모리가에 붙었다면, 전국시대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타카카게마저 토벌한 모리군은 이제 하루카타의 목을 찾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