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2) 미야오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스에 하루카타와 모리 모토나리의 대결; 

이쓰쿠시마 전투(2) 미야오 공방전


 코우지 원년(1555년)스에 하루카타가 대군을 인솔해 이와쿠니로부터 이쓰쿠시마에 건너, 언덕에 본진을 두고 모리측의 미야오성을 공격했습니다. 


 2만의 군세를 인솔하고 거점을 출발한 하루타다는 이와쿠니의 에이코우지(永興寺)에 여러 장군을 모으고 이번 모리 공격에 대해 군의를 엽니다. 용장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隆兼) 등 몇명의 무장은 육로를 선택할 것을 진언합니다. '아마 이번 미야오성은 육상의 야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원취의 고육지책이니 이쓰쿠시마를 고집하는 것은 그만둬야합니다.' 즉, 모토나리의 작전을 간파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타다는 '세토내해의 해상권을 잡으면, 해안 가의 모든 성은 손에 넣은것과 같다'는 생각을 고집합니다.


히로나카 타카카네(弘中隆兼)



 거기에 동조한 것이 바로 미우라 후사키요(三浦房清)입니다. 그는 '이쓰쿠시마를 제압하고 나서 본거지의 요시다로 향해도, 그다지 문제 없지 않습니까? 미야오성은 이 후시키요가 3일만에 정복해 보이겠습니다.' 얼마안되는 기간에 구축한 미끼의 성이기 때문에 그 견고함도 본격적인 성과 상대도 안되는 것이고, 섬이니만큼 주위를 하루타다의 군으로 둘러싸 버리면 자금의 운반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농성전도 길어질 리가 없겠지요.


 결국 군의는 '이쓰쿠시마 항해'로 정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코우지 원년(1555년) 하루타다는 인솔하는 2만의 대군은 500척의 배에 나눠 이와쿠니로부터 출항해 이쓰쿠시마로 가서 오모토포 근처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나서 미야오성의 남쪽에 있는 언덕에 본진을 지은 뒤, 오모토포 가까이의 호우토우나 미산에도 군사를 배치했습니다. 또한 바다에도 병선을 늘어놓아 모리의 응원군에 대비합니다. 이렇게 완벽한 포진을 실시한 후, 군의에서 자신감이 넘쳤던 후사키요를 선봉으로 삼아 미야오성을 공략합니다. 당시의 최첨단의 병기인 총까지 사용해 공격하는 하루타다군에 농성하는 미야오성은 패색이 짙었습니다. 결사의 저항을 계속하지만 이윽고 물의 보급도 끊어져 성의 공략은 시간문제가 됩니다. 





 미야오성에의 공격 개시를 들은 모토나리는 조속히 중신에게 부재 중을 기고겨 출발합니다. 모토나리의 이쓰쿠시마작전에는 조건이 하나 있으니 섬의 주위에 배를 파괴하고 성에의 공격을 걸고 있는 하루타다군을 독안에 든 쥐로 하기 위해서 꽤 큰 수군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때 모우리가 가지는 수군은 총 120척으로 하루타다의 500척에는 도저히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토나리는 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수군이 나타나는 기색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런 와중에 한층 더 미야오성에서 통지가왔으니, '지금, 군사의 옷을 찢어 만든 밧줄로 성벽을 묶어, 파괴를 막고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 10일도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미야오성이 넘어간다면, 이 작전 자체가 허사가 되기 때문에 모토나리는 초조하게 동맹군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