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0) 성과 공성전
성
성은 고대 일본에서는 '키(き)'라고 불렸습니다. 그 후, '죠(じょ)'라고 불리다가, 전국시대 중반에 '시로(しろ)'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쯔키지(築地)토루(土塁)
해자(堀)목책(尺木)
성에는 방어를 위해서 해자(堀), 쯔키지(築地: 흙담), 토루(土塁: 흙 보루), 목책(尺木), 담(塀) 등이 건설되었습니다. 해자는 단순히 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기둥으로 보강해, 흙을 굳히고 무너지지 않게 했습니다. 해자를 팠을 때에 나오는 흙을 쌓아 올이면 그것을 토루라 부릅니다. 목책은 재목을 우물 정(井)자의 무늬로 짜 올리기 때문에, 사이에 틈새가 생깁니다. 공방 시에 그 틈새로 공격을 하거나 적을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 있었습니다. 쯔키지에는 돌이나 욱새를을 혼합한 적토가 사용되었습니다. 담은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쓰효우(簀俵: 칡 가마니)로 덮었습니다.
에이로쿠 6년,사가미국 동군과 미우라군, 무사시국 히사요시기군의 마을들은 타마나와성(玉縄城)의 담의 구축을 명령받았습니다. 마을의 칸타카(貫高: 생산액에 따름 세금징수액)의해 담당하는 구간의 길이가 결정 되었습니다. 16관 마다 일간(一間)만큼 담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만들어진 목책은 지름 1 척 5 촌, 길이 9자의 밤(栗) 나무를 준비해, 그것을 일 간에 한 개씩 세웠습니다. 이 기둥은 남주(男柱)로 불렸는데, 목책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남주와 남주와의 사이에는, 길이 7척의 작은 목책 3개를 세웠습니다. 남주와 남주를 연결하도록 대나무가 옆에 걸처져 남주나 소목책을 연결하였습니다. 옆에 걸치는 대나무는 일실 마다 상하 2 개씩 총 4 개의 대나무가 보강으로 사용되어 목책이 만들어 졌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마자키성, 아케치 미쓰히데의 코오리야마 성의 성벽에는, 거꾸로 세운 지장(地蔵)이나 오륜탑(五輪塔)도 놓여 있었습니다. 성의 무사를 빈 것입니다. 또 묘지 위에 성을 짓는 것은 금기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무장들은 그것을 범하는 것으로, 반대로 좋은 성이 세워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불운에 불운을 거듭하면 오히려 행운이 된다는 일본의 믿음에서 유래한 것일 것입니다.
성병의 취사
슈한(手判)
성병은 장작을 확보해야 했기에, 성밖에 나와 장작을 모았습니다. 그 때 성문에서 '슈한(手判)'이라고 하는 신분증을 보여 문지기에 성의 문을 열도록 했습니다. 적국과의 경계에 위치한 성의 경우, 성병은 밖에서 적병과 조우하지 않게 주위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영주는 장작의 입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타치야마(立山: 사냥, 벌목이 금지된 산)를 마련해 백성등에 의한 나무의 벌채를 제한했습니다.
성병의 대변
성주에게 성병의 대변의 처리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평상시에 분뇨는 성밖에 옮겨져 흙에 묻혀 처리가 되었지만, 성의 근처에 묻으면 악취가 나기 때문에, 멀리 묻혔습니다. 다른 영주에게 성을 양도할 때, 성주는 성내의 분뇨가 잘 처리되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또한 성내의 분뇨를 모아 성을 공격하는 적병의 머리 위로 퍼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맞은 적병은 대단히 비참한 기분을 느꼈겠지요.
농성
적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병은 성에서 응전했습니다. 성의 방어력은 높고, 공성에는 다대한 희생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 때문에 공격측은 굳이 공성전에 돌입하지 않고, 수성하는 측의 병량이 다하기를 기다렸습니다. 패배를 깨달은 성주는, 성병과 성내의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대가로 할복하고 항복했습니다. 때로 공격측은 성의 사람들을 학살해 항복하지 않을 경우의 경고로 삼기도 했습니다.
후힐(後詰)
공성전에서 농성측의 원군으로 파견된 부대를 말합니다. 후힐이 없는 경우, 농성군의 사기는 저하해, 항복하거나 성이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후권(後巻)
성을 포위하는 군세를, 원군이 한층 더 포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공성측이 기나긴 성공격으로 피폐 했을 때에 공격을 하려는 것이지요.
물의 확보
물이 없으면 견고한 성도 몇일에 함락 됩니다. 수원을 끊기지 않게 최대의 주위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평소부터 통에 물을 모아 두면 좋지요. 물이 다한 것을 눈치채이지 않게 백미로 말을 씻어 상대의 사기를 줄이기도 했습니다.
식료의 확보
식료, 소금, 무기의 확보가 제일 중요합니다. 따라서 평소부터 식료를 비축해야 하지요. 병량을 아껴야 했기에, 농성중에는 변변찮은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물자의 확보
적이 공격해 온다고 알면, 움직일 수 있는 물자는 성 안으로 옮기고, 옮길 수 없는 것은 묻거나 태웠습니다. 적에게 사용될 바에야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장작이나 밧줄(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무기의 확보
기물은 주석, 납으로 만든 것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철포의 탄환으로 가공 할 수 있었습니다. 농성 시에는 성벽을 오르려고 하는 적병에게, 위에서 돌을 던졌습니다. 돌을 줄로 묶어 성벽에 매단 뒤에, 적병이 오면 줄을 자릅니다. 이렇게 하면 힘이 없는 부녀자라도 응전 할 수 있었습니다.
수목의 확보
수목의 열매는 식용이 되고, 가지로는 무기나 장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내의 수목은 잎이나 열매가 식용이 되는 종류를 선택합니다. 대나무는 용도가 많기 때문에 선호되었습니다.
시야의 확보
성의 주위에 수목이 무성하면 , 적이 있는 곳을 파악할 수 없숩니다. 주위의 수목은 베어내어 시야를 확보했습니다.
공성
난공불락의 오사카성
공성전에는 큰 각오가 필요합니다. 농성을 잘 하면, 공격측에게 큰 손해를 주기도 합니다. 공성의 손해는 고스란히 영주의 손해가 되기 때문에, 무리한 공격은 기피했습니다. 손해를 줄이기 위해 항복을 권고해, 개성 시키는 것이 많았습니다. 공성의 때, 공격측은 '세이로(勢楼,井楼)'라고 하는 정찰용의 망루를 쌓아 올렸습니다. 높은 곳에서 성내의 모습을 보아 우위에 서려했던 것입니다. 세이로 위에서 철포나 화살로 공격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공격측은 성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진의 주위에 해자를 팠습니다. 그 때에 흙을 파 내며 쯔키야마(築山: 가산)도 만들었 습니다. 쯔키야마를 이용해, 성 측의 총격을 막으면서 응전했습니다. 쯔키야마의 뒤에는 짚으로 가마니를 짜, 전선에 옮겨졌습니다. 성을 향해서 돌격 할 때, 아시가루는 이것을 가지고 가, 성의 해자에 도달하면 던져 매립했습니다. 풀은 흙보다 가볍고, 운반이 용이하기 때문에 매립에 이용되었습니다.
다케다와 카나보리(金堀: 광부)
광산에서 채굴에 종사하는 광부는, 그 능력을 평가받아 전투에 참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케다가는 카나보리를 통괄하는 카나야마중(金山衆)을 중시해, 측량의 대상으로부터 제외하는 등 특별한 취급을 해 주었습니다.
카나보리(金堀)
에이로쿠 5년 정월, 무사시 쇼우잔성 공격 때에, 다케다 신겐은 카나보리에 갱도를 파게 해 로(櫓) 둘을 파괴했습니다. 이로인해 성 측이 농성에 대비해 물을 모으고 있던 큰 독이 깨져 버려, 물과 함께 대량의 흙과 모래가 갱도에 흘러들어, 카나보리의 반수가 사망한다고 하는 대참사가 있었습니다.
겐키 2년 정월, 다케다 신겐은 스루가 후카자와성 공격에 카나보리를 참가시켰습니다. 호조 우지마사는 우에스기가에 서신을 보내, 전황을 전하고 있었는데, 이것에 따르면 키호조군은 후힐로 정월10일에 오다와라를 출진했으나, 타케다군이 카나보리를 사용해 본성의 외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정월 음력 16일 밤, 성주는 후힐을 기다리지 않고 항복해 버렸습니다. 동년 2월 13일, 다케다 신겐의 발급한 인한죠(印判状)안에 스루가 후카자와성 공격에 참가한 카나보리에 포상을 주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겐키 4년 정월, 미카와 노다성공격에서도 다케다가의 카나보리는 동원되었습니다. 카나보리는 성의 급수를 끊어, 갈증에 괴로워하던 성은 개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덴쇼 2년, 다케다 가쓰요리도 도토미 타카마카미성 공격에 카나보리를 동원해, 로를 무너뜨려 함락 시켰습니다. 덴쇼 3년 사츠키, 미카와 나가시노성공격에서도 카나보리가 동원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의 성
전투가 다가왔을 경우, 마을에서는 큰 소리로 외쳐, 경종을 울리고 위험을 알렸습니다. 봉화가 피워지기도 했습니다. 위험을 알면서 보고 보지 않는 모습을 한 사람은, 마을에서 소외되었습니다.(잇키란 무엇인가?참고) 이렇게 해 마을은 즉석에서 무장해, 가재도구를 옮기고 '마을의 성(村の城)'으로 들어 갔습니다.
마을의 성(村の城)
마을의 성은 산이나 숲에 지어졌습니다. 나무나 풀등으로 만들어진 간소한 건물이었습니다만, 전투가 일어나면, 마을사람은 그 안으로 피난했던 것입니다. 약탈에서 피하기 위해, 마을사람은 마을의 주위를 해자로 둘러싸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을은 자위를 위한 진지를 구축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화로부터 피하기 위해라고 해도, 마을사람이 무장을 하고 산에 피하는 것을 영주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공격하는 측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적대 행위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마을사람은 사슴 사냥을 간다고 영주에게 거짓 보고를 해, 적대 행위로 보여지지 않게 주의했습니다. 신사나 사원은 공계(公界)라 불리며 성역으로 공격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전투가 일어나면 마을 사람들의 피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당시는 지샤의 부지에 한 번 묻은 것은 신의 소유물이 되어, 누구의 물건도 아니게 됩니다. 그 때문에, 신이 물건을 지켜 준다고 하는 신앙이 태어났습니다. 백성은 지샤에 가구등을 맡기거나 부지에 묻어 가구를 전화로부터 지키려고 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 전쟁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2) 전후처리 '쿠비짓켄' (0) | 2012.12.29 |
---|---|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11) 승패 (0) | 2012.12.29 |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4) 전쟁의 이모저모 (0) | 2012.12.28 |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3) 보급 (0) | 2012.12.28 |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 (9) 야습,방화와 추격, 구원 (0) | 2012.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