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10년간의 이시야마 전투 드디어 종결하다
덴쇼 8년(1580년) 혼간지 켄뇨가 퇴거한 뒤에도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교뇨(教如)가 이시야마 혼간지를 퇴거해 10년에 이르는 이시야마 전투가 종결했습니다.
제11대 법주 켄뇨의 오사카에 위치한 이시야마혼간지는 매우 거대했습니다. 고에이도우(御影堂)를 중심으로 하는 혼간지의 가람들을 일본어 코(コ)의 글자처럼 6개의 혼간지 내의 마을들이 둘러싸, 각각의 마을은 혼간지에 세금을 납입하는것 외에는 자유로운 자치 제도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어, 그 주민은 1만명을 넘는 수였다고 합니다. 천하를 노리는 노부나가에게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는 혼간지와 그 문도들은 골칫거리였지요. 게다가, 혼간지 신자에 의한 잇코우 잇키는 농민이 죽창을 든 오합지졸이 아니고, 실제 무장들이 지휘하는 훌륭한 무장 집단이었는 데다, 나가시마 잇코우 잇키와의 전투에서는 목숨까지 위험했었지요.
이시야마혼간지의 모습
이런 노부나가에 대항해 켄뇨는 반 노부나가 연합에 들어가 대항합니다. 오부나가가 오사카 만을 점령해 해상으로 자금 보급을 못하게 된 혼간지는 기세를 잃지만,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이 참여해(키즈가와구 해전) 노부나가의 수군을 무찌릅니다. 게다가 아라키오성이 배신해 육로도 열리게 되지요. 하지만 덴쇼 7년 노부나가의 철갑선이 모리 수군을 격파하고(제 2차 키즈가와구 해전), 아라키오성도 함락당해 버립니다. 다시 위기에 빠진 혼간지는 몰살의 위협을 느낍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때 오히려 화목의 제스쳐를 보입니다. 덴노를 사이에 두어 화목을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시야마혼간지를 여기서 태워봐야 혼간지 문도의 분노를 사 잇코우 잇키가 더 발발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시야마 혼간지 위에 지어진 오사카성
쇼군의 요청에 의해 생긴 반 노부나가 동맹, 하지만 그보다 높은 덴노의 칙령은 훨씬 더 큰 효력이 있었지요. 이를 명분으로 이시야마 혼간지와 노부나가는 화해합니다. 그리고 덴쇼 8년(1580년) 봄 노부나가의 서약문이 혼간지에 건네져 켄뇨가 오사카를 퇴거해 기슈 사이가에 물러나는 대신 노부나가는 신자들의 생명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이 강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켄뇨의 장남의 교뇨였습니다. 하지만 교뇨도 덴쇼 8년(1580년) 여름 드디어 혼간지를 퇴거해 여기서 이시야마 전투는 종결했습니다. 이 퇴거일의 차이로 인해 후에 동서 혼간지로 갈리게 됩니다. 교뇨 역시 사이가로 움직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오다는 불을 지르니, 3일 밤낮동안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후에 히데요시는 여기에 난공불락의 오사카 성을 쌓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 정말로 이시야마 혼간지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그건 일본 사학계가 더 밝혀 낼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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