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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4) 오오토모의 몰락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4) 오오토모의 몰락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대패한 오오토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시마즈가 기습으로 오오토모의 기세를 꺽은 타카기카와 전투(타카기카와 전투) 후에, 다키타 시게카네(田北鎮周)의 무모한 돌격으로 인해 미미가와에서 오오토모군은 패퇴하고 맙니다.(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이전까지 큐슈의 소린의 위치는 강대한 것이여서 선교사들은 그를 '분고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그 행동거지는 별로 신실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의 왕국 무지카 건설에 전념하려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이전의 아내와는 결별해 새 아내를 맞이하고, 영주의 자리도 아들 요시무네(義統)에게 양도했습니다. 하지만 실권은 여전히 소린이 지닌 상태로 주력 부대를 이끌로 휴우가로 향하고, 요시무네는 명목상으론 총사령관이지만 후방에서 소린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요시무네는 계속 간섭하는 아버지에 불만을 안고 있었습니다.


류조지 다카노부


 이런 상황에 미미가와에서 오오토모가 대패하자, 히젠의 곰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타카노부의 봉기에 치쿠고의 쿠니진들은 일제히 타카노부에 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치쿠젠이나 토요마에등 주변의 전국 다이묘도, 반 오오토모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애초에 크리스트교는 일본 토착 신토의 덴노의 신격화를 반대하기 때문에, 오오토모 소린에 불만을 안고 있는 영주들이 많았던 것도 한 몫 했겠지요.


타와라 치카히로


 이런 상황에 오오토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오오토모 소린의 오른팔이었던 중신 타와라 치카히로(田原親宏)는 오오토모에서 등을 돌립니다. 이에 수많은 가신들이 동요하지요. 그는 원래 타와라가의 영지를 돌려주지 않으면 적의 세력에 붙겠다고 합니다. 부득이, 소린은 치카히로의 요구를 들어 영토를 도와주지만 이것이 가신들의 동요를 한층 더 가속시킵니다. 우연히, 그 직후에 치카히로가 병사해 일은 잘 풀릴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게 했습니다. 하지만 치카히로의 뒤를 이은 양자 치카쯔라(親貫)가 아버지와 같을 자세를 취했고, 다른 오오토모 가신들도 배반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삼국지가 된 큐슈에서 류조지와 시마즈의 항전이 정점으로 달했던 덕분에 오오토모는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덴쇼 12년(1584년) 오키타나와데(沖田畷) 전투에서 다카노부가 시마즈에 져서 전사하자, 시마즈의 화살은 다시 오오토모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결국 소린은 덴쇼 13년(1584년)에 하시바 히데요시에 구원을 요구합니다. 이 오오토모의 요청을 듣고 히데요시는 시마즈에 '정전'을 타진합니다. 이 때의 히데요시는 아직 고마키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를 끝낸 직후여서 체력이 빠진 상태였지요. 따라서 시마즈는 히데요시의 정전안을 무시하고 오오토모 영지로 공격을 계속합니다. 


 결국 소린은 덴쇼 14년(1586년)에 스스로 오사카성으로 향해 히데요시를 만나, 시마즈를 토벌해 달라 합니다. 이전에, 기슈 정벌을 끝내 시코쿠도 평정한 히데요시는 이 소린의 요청을 받아 큐슈 평정에 향합니다. 이 뒤로는 시마즈와 히데요시의 싸움이 되지요. 그리고 오오토모는 히데요시 산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의 아들 요시무네는 후에 소린이 죽은 뒤에 영지가 몰수되어, 재기를 위해 여러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음에 요시무네가 나올 때 기억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