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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라노 키요모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4) 미즈시마 전투 지에이 2년(1183년) 윤 10월 1일, 서쪽 지방으로 도망친 타이라와 그 추토를 명령받은 키소노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싸운 미즈시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겐페이 전투가 공공연하게 된 지쇼 4년(1180년) 5월에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미나모토노 요리마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8월에는 모치히토왕이 타도 타이라의 영지를 발합니다.(타이라 토벌의 영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켜(이즈 발기), 10월에는 후지가와에서 타이라 가문은 크게 패해 버립니다.(후지가와 전투)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키쇼(미나모토)노 요시나카도 군사를 일으켜 이치하라 전투에서 승리합니다.(이치하라 전투) 키소노 요시나카는 그대로 여..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9) 킨사죠 공방전 지쇼4년(1180년) 11월 4일, 후지가와 전투에 이어 겐페이 전투로 킨사죠 전투(金砂城の戦い)가 발발했습니다. 전년의 11월에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지쇼 3년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결행해,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 하고 그의 원정을 멈춘 뒤에 법황의 신하나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버렸습니다. (지쇼 3년의 정변) 이에 모치히토왕(以仁王)이, 다음 해의 4월에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해(타이라 토벌의 영지) 8월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깁니다.(요리토모 발기) 관동지방에서 반 타이라를 부르면서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정했기 때문에, 키요모리는 스스로의 적손 타이라노 코레모리(平維盛)를 지휘..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지쇼4년(1180년) 5월 26일, 겐페이 전투의 개막 우지바시 전투(宇治橋合戦)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 진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는 뵤됴인(平等院)에서 할복 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 '시시가타니 음모(시시가타니 음모)'로 불리는 '반 타이라'의 싹을 사전에 자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이윽고, 딸 토쿠코가 낳은 아이를 불과 3세에 안토쿠덴노(安徳天皇)로 즉위시켜, 타이라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절정기일수록 '타도 타이라'의 세력도 높아집니다. 이윽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로, 계승권은 훨씬 위에 있지만 번번히 밀린 모치히토왕(以仁王)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가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이라 토벌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지쇼4년(1180년) 4월 9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 황태자 모치히토왕이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했습니다. 헤이지 원년(1159년)의 12월에 발발한 헤이지의 란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대승리로 끝났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지고 있던 니죠 천황과 후 시라카와 법황을 구조해 낸 일로 신망을 얻은 타이라 가문은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8년 뒤 닌안 2년(1167년)에는 50세로, 태정관까지 오른 키요모리(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이때의 타이라 가문은 공경 16명, 4~5품 이상의 당상관 30명 등 에다가, 일본의 거의 절반의 수령, 궁중 경비, 제사까지 맡는 전대미문의 영화를 누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겐페이 쟁란의 시작, 지쇼 삼년의 정변 지쇼 3년(1179년) 11월 17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의 신하를 관백 이하 공경 39명을 해임해 '지쇼 3년의 정변(治承三年の政変)'을 결행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에 발각된 시시가타니의 음모(시시가타니의 음모)에서 '반 타이라 가문'의 기치를 올리지만, 현실을 모른채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다 실패해 버립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주모자 중 한명이었으나 훌륭히 살아남게 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상부상조로 서로를 돕던 고시라카와 법황과 타이라노 키요모리 사이에 큰 도랑이 생겼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음 해 11월에 키요모리의 딸인 토쿠코(徳子)가 사내 아이를 출산합니다. 토쿠코는 당대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시시가타니의 음모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시시가타니의 음모 지쇼 원년(1177년) 5월 29일, 타카히로(俊寛)의 산장에서 행해지고 있던 타이라 가문 타도 집회에 고시라카와 법황이 출석해 후에 '시시가타니의 음모'라고 칭해지는 회합이 열렸습니다. 원래 닌안2년(1167년)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급작스런 승진으로 태정관으로 취임(키요모리의 태정관 취임) 하고 나서는 그 힘은 더욱 커져, 교토에서는 머리카락을 짧게 잘르고, 붉은 줄을 드리운 '카부로(禿童)'라고 불리는 15~16세의 소년들 300명 정도가 돌아다니며 타이라 가문에 반발하는 사람이나 욕을 하는 사람을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토 도처를 걸어 다니며, 반발하는 사람을 찾아내서 저택에 침입해 재산을 몰수하고 욕한 본인을 잡아 로쿠하라(六波羅)에 인도한.. 더보기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닌안 2년(1167년) 2월 11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사다이진(左大臣), 우다이진(右大臣)을 역임하고, 벼락출세 해 태정관(太政大臣)에 올랐습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헤이안 시대 마지막에 귀족이 아니고, 무사 최초로 정권을 잡아, 헤이케 전성 시대의 기반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의 적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출세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례중의 이례로,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나 「미나모토 타이라 성쇠기(源平盛衰記)」에서는 재밌게도 키요모리 사생아설이 나와 있습니다. 키요모리는 12세에 종오위에 제수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인 타다모리는 종사위로, 아무리 아버지의 위광이 있었다고 해도 있을 수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