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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토모 소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카톨릭 왕국의 꿈, 오오토모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카톨릭 왕국의 꿈, 오오토모 가문 일본 전국시대에 전파된 남만신교(기독교)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쳐, 기리시탄(크리스천) 다이묘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리시탄 다이묘의 대표가 다름아닌 오오토모 소린입니다. '분고의 왕'이라 불렸던 소린의 오오토모 가문에 대해 포스팅 하려 합니다.오오토모 가문의 성립 원래 지금까지는 오오토모 가문의 선조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서자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카하라(中原)가문이 오오토모 가문의 선조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아무튼 '오오토모' 마을에 거점을 둔 이들은 자연스레 스스로를 '오오토모'라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오오토모의 시조 요시나오(能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서 분고국의 수호직을 제수받게 됩니다. 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모토나리와 오오토모 소린의 대결, 모지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모토나리와 오오토모 소린의 대결, 모지성 공방전 에이로쿠4년(1561년) 모리 모토나리가 오오토모 소린의 공격을 받고 있던 모지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파견했습니다. 전국 3대 기습전의 하나라고 하는 이쓰쿠시마 전투로 스에 하루카타를 넘어뜨려 젊은 당주 오오우치 요시나가를 할복시키고, 츄고쿠 지방의 명문 오오우치씨를 멸망시킨 아키의 전국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는 이제 시선을 아키 밖으로 돌립니다. 오오우치가와 패권을 다투고 있던, 아마고가도 이때 약체화하기 시작합니다.(아마고의 몰락) 그런 가운데 큐슈의 입구 모지에 있는 모지성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오오우치가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오우치가가 멸망 해(오오우치 멸망), 오오토모 소린이 맡을 뻔한 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시마즈의 큐슈정벌 이와야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시마즈의 큐슈정벌 이와야성 공방전 덴쇼 14년(1586년) 큐슈 전 국토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 시마즈가 오오토모의 치쿠젠 이와야성(岩屋城)을 공략했습니다. 덴쇼 13년(1585년)의 3월~4월에는 기슈(기슈정벌)를, 6월~7월에는 시코쿠(시고쿠평정)를 평정 해, 순조롭게 천하 통일에의 길을 걷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지만 아직 큐슈에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 해의 오키타와테 전투(다테나와테 전투)의 류조지를 물리친 사츠마의 시마즈가가 큐슈 전 국토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덴쇼 14년(1586년) 7월 드디어 시마즈씨는 본격적으로 치쿠젠 공격에 착수합니다. 14일에는 치쿠젠의 이와야성에 공격이 개시됩니다. 이 때의 시마즈군은 이 앞의 오키타나와테 전투에..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4) 오오토모의 몰락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4) 오오토모의 몰락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대패한 오오토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시마즈가 기습으로 오오토모의 기세를 꺽은 타카기카와 전투(타카기카와 전투) 후에, 다키타 시게카네(田北鎮周)의 무모한 돌격으로 인해 미미가와에서 오오토모군은 패퇴하고 맙니다.(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이전까지 큐슈의 소린의 위치는 강대한 것이여서 선교사들은 그를 '분고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그 행동거지는 별로 신실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의 왕국 무지카 건설에 전념하려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이지 않던 이전의 아내와는 결별해 새 아내를 맞이하고, 영주의 자리도 아들 요시무네(義統)에게 양도했습니다. 하지만 실권은 여전히 소린이 지닌 상태로 주력 부대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3) 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오오토모를 괴멸시키다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3)시마즈의 츠리노부세 작전, 오오토모를 괴멸시키다 덴쇼 6년(1578년), 타카기카와 전투로 시작된 오오토모 소린과 시마즈 요시히사세의 미미가와 전투가 본격적으로 겨격화 됩니다. 사츠마, 오스미를 지배하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후유가 남부를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에게 구원을 청해 그것을 듣고 후유가 탈환을 목표로 하는 오오토모군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진한 시마즈군이 싸운 미미가와 전투의 처음은 타카기카와의 기습전(타카기카와 전투)으로, 시마즈의 대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미마가와 전투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대패의 반성과 전략 수립을 위해 열린 오오토모군의 군의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다키타 시게카네(田北鎮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2) 미미가와 전투의 막이 오르다 타카기카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2)미미가와 전투의 막이 오르다타카기카와 전투 덴쇼 6년(1578년)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과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와의 미미가와 전투의 초전 타카기카와 전투가 있었습니다. 덴쇼 5년(1577년)의 기자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대패를 당해, 휴우가의 남쪽을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구원을 요청해, 시마즈와의 항전을 결의한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은 휴우가의 땅 일부 양도를 약속받아, 크리스찬의 이상향 뮤지카를 지으려 했습니다. 이전의 부인과 이혼하고 크리스천인 새부인 쥴리아를 맞이해 본인도 돈 프란시스코로 개명해, 아들에게 다이묘 자리를 주고 출진합니다. 소린은 3만 5천의 군세를 해로로 이끌어 용이하게 후유가로 진출해 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1) 오오토모군 타가성 공격 개시 일본 전국시대;미미가와 전투(1) 오오토모군 타가성 공격 개시 덴쇼 6년(1578년)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이, 타와라 치카카타(田原紹忍)을 총대장에게 임명해 휴우가 타카키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덴쇼 5년(1577년)의 기자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대패를 당해, 휴우가의 남쪽을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구원을 요청해, 시마즈와의 항전을 결의한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은 휴우가의 땅 일부 양도를 약속받아, 크리스찬의 이상향 뮤지카를 지으려 했습니다. 이전의 부인과 이혼하고 크리스천인 새부인 쥴리아를 맞이해 본인도 돈 프란시스코로 개명해, 아들에게 다이묘 자리를 주고 출진합니다. 소린은 3만 5천의 군세를 해로로 이끌어 용이하게 후유가로 진출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오토모 소린, 무지카 건설에 착수하다 일본 전국시대;오오토모 소린, 무지카 건설에 착수하다 덴쇼 6년(1578년) 오오토모 소린이 3만 5천의 대군을 인솔하고, 휴우가(日向) 나우시카(無鹿)에 진을쳤습니다. 휴우가 중앙에 일대 세력을 쌓아 올리고 있던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시마즈의 공격을 당해 본거지인 사도하라성(佐土原城)에서 쫓겨나 분고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에게 도망친 것은 덴쇼 5년(1577년)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둘은 결혼으로 인한 친척관계이기에 소린은 요시스케를 도우려 합니다. 하지만 가신들은 이에 반발했습니다. 순조롭게 영토를 넓혀 이미 큐슈에까지 세력을 펼치고 있는 츄고쿠의 패자 모리 모토나리, 히젠의 곰 류조지 다카노부등이 있었기에 소린이 남쪽을 향해 출진하면, 그들에게 배후를 위협해질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기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오토모 후계자 분쟁, 오오토모 2층의 참변 일본 전국시대;오오토모 후계자 분쟁, 오오토모 2층의 참변 텐몬19년(1550년) 분고(豊後)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가의 20대 당주 오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발발했으니, 이것이 '오오토모 2층의 참변(大友二階崩れの変)'입니다. 분고의 전국 다이묘인 오오토모가의 제20대 당주 오오토모 요시아키에게는 정실이 낳은 요시시게(義鎮)라는 21세 장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측실이 낳은 삼남 시오이치마루(塩市丸)을 후계자로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장남 요시시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가신을 손으로 때리거나 검술의 연습인데도 상대를 무참히 치는등 천성이 난폭했다는 설, 요시시게가 병약했었기 때문에 당주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설, 요시시게의 어머니가 스오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