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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겨울의 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9) 강화성립, 겨울의 진 종결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19일, 오오사카 겨울의 진의 강화가 성립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7) 사나다마루 공방전 게이쵸 19년(1614년) 12월 4일, 최초부터 도요토미측이 불리했던 오사카 겨울의 진 중에서, 유일하게 도요토미 측이 도쿠가와 측에게 압승한 사나다마루 공방전이 있던 날입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게이쵸 19년(161..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5)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5)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9일, 오오사카동의 진의 야전, 바쿠로우가후치(伯労淵), 노다(野田), 후쿠시마(福島) 전투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4) 우에스기의 분전,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26일,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최대의 격전이 된 시기노, 이마부쿠 전투(鴫野, 今福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뿐만 아니라 교토에서 거지로 영락한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나, 서당의 선생님으로 생..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3) 결전을 앞둔 오사카성의 모습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3) 결전을 앞둔 오사카성의 모습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5일, 오사카 측의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가 도쿠가와측 마쓰다이라 타카아키(松平忠明), 혼다 타다마사(本多忠政)에게 습격을 받아, 결전을 피해 오사카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서 오사카 겨울의 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기부한 호코지 종명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트집을 잡은 것이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호코지 종명사건) 이야에스가 무리한 조건을 내고 도요토미 측에 최후 통고를 낸 것이 8월 20일(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실패) 입니다. 이윽고, 결전을 각오한 오사카측의 요청에 따라 사나다 유키무라가 쿠도산을 탈출해(쿠도산을 탈출하다), 오사카성에서는 군의가 열립니다.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2) 일본의 게르니카 히라노고우 방화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2) 일본의 게르니카 히라노고우 방화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5일, 오사카측의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가 도쿠가와 측에 붙은 히라노고우(平野郷)에 불을 질러, 스에요시 요시코우(末吉吉康) 일족을 죽였습니다. 전국시대의 영민은 완전히 전투에 무관계한 일반인 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각의 마을이나 취락 단위로, 오사카 측에 서는지, 도쿠가와 측에 서는지를 결정해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오늘의 무대인 히라노고우는 해자와 토루로 둘러쌓인 환호 집락(環濠集落)이 되어, 사람들의 협의에 의한 규칙으로 자치와 자위가 행해진 자유 도시였습니다. 적극적으로 행해진 상업 활동에 의해, 전국..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