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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

일본 전국시대; 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일본 전국시대;야마나가와 아카마츠가의 갈등 분메이 11년(1479년), 오닌의 난( 오오닌의 난) 이후에 교토에 머물렀던 야마나 마사토요가 영토인 타지마로 돌아왔습니다. 야마나 마사토요는, 오닌의 난에서 서군의 대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손자(일설에는 아들)입니다. 동군의 대장인 호소카와 가쓰모토 사후에 그의 아들인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화평을 맺어, 오닌의 난을 끝낸 사람이지요. 이 오닌의 난을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시대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막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가지 일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오닌의 난이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무렵은, 동서 양자가 활발하게 전투를 벌이면서도, 막부아래에 관령가가 있고, 그 아래에 수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종결과 그 영향 일본 전국시대;오닌의 란의 종결과 그 영향 오닌의 란은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신은 명목상 장원을 가지고 있어 그 수입으로 먹고 살았는데, 전란에는 장원에서의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문신의 생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치죠 노리후사(一条教房)는 전 관백이였지만, 문신이었기에 오닌의 란이 발발한 이듬해 영지인 토사(土佐)로 떠납니다. 그의 저택은 타버렸고, 방대한 장원은 소실되었지요. 목숨만을 간신히 건져 나라로 피신했었습니다. 이런 그의 귀농(?)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관백까지 오른 사람이 지방으로 돌아가다니요. 조정에서도 반대한 귀족이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토사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는 않으나, 지나치게 시골이였습니다. 그런데 전 관백인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판세를 바꾼, 이나리야마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판세를 바꾼, 이나리야마 공방전 쇼코쿠사의 전투(쇼코쿠사의 전투)는 생각보다 동군과 서군에게 큰 상흔을 입혔습니다. 저번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이, 이들의 목적은 절대 교토에서 끝을 보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피해는 서로에게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쇼코쿠사의 전투이후로 동군과 서군에는 이렇다 할만한 충돌이 없이 폭풍전야의 고요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덧 오닌 원년이 끝나고, 다음해가 찾아옵니다. 딱히 큰 전투가 없으니 동군과 서군은 장기전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흙으로 보루를 쌓고, 해자를 만들어 방어를 공고히 하게 되지요. 동군이 20m의 망루를 설치하면, 서군이 30m의 망루를 설치하는 냉전시대의 소련과 미국같은 군비(?)경쟁을 시작하지요. 그러다가 적이 보이면 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격화, 쇼코쿠사의 전투 일본 전국시대;오닌의 란의 격화, 쇼코쿠사의 전투 동군은 쇼군을 옹립했으나 총사령관 요시미가 전쟁을 방폐하고, 서군은 역적이 되었으나, 오오우치 마사히로가 참여하는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 동군과 서군은 타개책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닌 10월, 서군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아사쿠라 타카카게가 쇼코쿠사에 진을 치고 있는 타케다 노부가타를 공격합니다. 첫날, 쇼코쿠사에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납니다. 아무래도 최근 사기가 높아진 것은 서군이고, 동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보니 서군의 기세에 앞도된 동군은 일단 퇴각을 개시합니다. 서군은 죽인 목을 수례에 한가득 실고 의기양양해서 귀환했다고 합니다. 둘째날, 의기양양해져 방심이 생긴 서군과, 어제의 보복이라는 증오로 뭉친 동군 그리고 요시나리에 강렬한 증오를 품고있는 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초전, 5월 전투 일본 전국시대;오닌의 란의 초전, 5월 전투 지난 포스팅들로 인해 벌어진 오오닌의 난 이후 전국의 다이묘들은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11년 동안이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25만명에 달하는 군대가 싸우는 동안 교토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었지요. 고료의 전투 이후 가스모토는 세력을 결집시켰고, 쇼군의 사저를 제압한뒤 쇼군을 확보하고, 천황과 상황의 거처를 무로마치정으로 옮깁니다. 이에 대해 소젠은 교토의 서쪽에 본진을 두고 가스모토의 동군과 대치합니다. 병력은 대략 서군이 11만, 동군이 16만으로 추정하나, 이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들의 진 사이의 거리는 불과 수백미터인데도, 유명한 장수가 목숨을 잃는 일은 없이 전쟁이 계속되었었습니다. 재밌지 않나요? 25만의 군세가 대치하는데 이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서막, 고료 전투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서막, 고료 전투 저번 포스팅에서 하타케야마가의 후계자 분쟁을 다룬 것이 기억나시나요? 그 분쟁에서 하타케야마의 후계를 놓고 아들인 요시나리와 동생인 마사나기가 크게 부닥친 것이 바로 이 고료 전투입니다. 늦둥이 아들인 하타케야마 요시나리는 1466년 12월 뜬금없이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 교토 북서쪽의 지장원에 진을 칩니다. 그리고 그는 쇼군 요시마사를 설득합니다. 그 설득에 넘어간 요시미사는요시나리를 화려한 저택, 고쇼로 부르고 마사나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월에 행해지는 행사를 중지시킴으로서 알립니다. 그리고 결국 요시미사는 공식적인 연회에서 하타케야마의 후계로 요시나리를 정하고, 마사나가에게 고토의 저택을 요시나리에게 양도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마사나가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