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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마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2) 우지바시 전투 지쇼4년(1180년) 5월 26일, 겐페이 전투의 개막 우지바시 전투(宇治橋合戦)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 진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는 뵤됴인(平等院)에서 할복 했습니다. 지쇼 원년(1177년) 5월 '시시가타니 음모(시시가타니 음모)'로 불리는 '반 타이라'의 싹을 사전에 자른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는 이윽고, 딸 토쿠코가 낳은 아이를 불과 3세에 안토쿠덴노(安徳天皇)로 즉위시켜, 타이라 가문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절정기일수록 '타도 타이라'의 세력도 높아집니다. 이윽고 고시라카와 법황의 아들로, 계승권은 훨씬 위에 있지만 번번히 밀린 모치히토왕(以仁王)과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가 접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이라 토벌의.. 더보기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 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역사편;겐페이 전투(1) 모치히토왕, 영지를 발하다 지쇼4년(1180년) 4월 9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 황태자 모치히토왕이 타이라 토벌의 영지를 발했습니다. 헤이지 원년(1159년)의 12월에 발발한 헤이지의 란은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대승리로 끝났습니다. 적의 손에 떨어지고 있던 니죠 천황과 후 시라카와 법황을 구조해 낸 일로 신망을 얻은 타이라 가문은 일본의 패자가 됩니다. 8년 뒤 닌안 2년(1167년)에는 50세로, 태정관까지 오른 키요모리(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이때의 타이라 가문은 공경 16명, 4~5품 이상의 당상관 30명 등 에다가, 일본의 거의 절반의 수령, 궁중 경비, 제사까지 맡는 전대미문의 영화를 누려, '타이라 가문이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 하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