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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모토나리와 오오토모 소린의 대결, 모지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모토나리와 오오토모 소린의 대결,

모지성 공방전



 에이로쿠4년(1561년) 모리 모토나리가 오오토모 소린의 공격을 받고 있던 모지성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파견했습니다. 


 전국 3대 기습전의 하나라고 하는 이쓰쿠시마 전투로 스에 하루카타를 넘어뜨려 젊은 당주 오오우치 요시나가를 할복시키고, 츄고쿠 지방의 명문 오오우치씨를 멸망시킨 아키의 전국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는 이제 시선을 아키 밖으로 돌립니다. 오오우치가와 패권을 다투고 있던, 아마고가도 이때 약체화하기 시작합니다.(아마고의 몰락)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그런 가운데 큐슈의 입구 모지에 있는 모지성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오오우치가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오우치가가 멸망 해(오오우치 멸망), 오오토모 소린이 맡을 뻔한 이 성을 에이로쿠 원년(1558년)에 모토나리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탈취해 모리는 여기를 거점으로 키타큐슈에의 세력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 다음 해의 에이로쿠2년(1559년)에, 지금까지의 분고, 히젠 , 히고에 더해 토요마에, 치쿠고, 치쿠젠의 수호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관직을 받은 소린에 있어서 이 모리의 세력 확대를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명과의 무역이나 남만과의 무역으로 돈을 벌고 있는 오오토모가에게 모지와 간몬 해협의 해상권은 생명줄입니다.



모지성 공방전 전개도


 

 에이로쿠4년(1561년) 소린은 명장 타치바나 도세츠(立花道雪)에 1만 5천의 대군을 주어 모지 반도를 공격시킵니다. 하지만 모지성은 해발 175 m의 산 정상에 요충지이고 수비를 맡은 니호 타카야스(仁保隆康)가 지켜 좀처럼 점령할 수 없었습니다. 소린은 이 상황에서 전대미문의 작전을 펼칩니다. 해외무역에 뛰어난 소린은 크리스트교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외국에 꽤 인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카타에 정박중이었던 포르투갈선에 출동을 요청합니다. 그 요청을 받아들여 간몬 해협에 나타난 서양 선박은 해상에서 모지성을 향해 포격을 개시합니다. 일본의 군사 사상, 첫 함포 사격이 있었다는 전투 모지성 공방전입니다. 이 최신 병기에 아무리 타카야스도 경악하고 병사들도 위축됩니다. 



남만(서양)선의 위용!



 이에 당황한 모토나리는 에이로쿠4년(1561년) 전에 이 모지성을 점령한 자신의 아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지원병으로 보냅니다. 타카카게가 도착하고 머지않아 세토 최강의 모리 수군은 어떻게든 간몬 해협의 해상권을 잡게 됩니다. 힘겹게 모지성에 들어온 타카카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배신자가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전에 발각되어 이 내통자를 처분해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연 모토나리의 아들, 단순히 배신자를 처단하지 않고 그를 이용할 계책을 생각해 냅니다. 봉화를 올려 오오토모군에게 모리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처럼 꾸민 것이지요. 오오토모군은 봉화의 신호를 믿어 단번에 모지성으로 쳐들어갑니다.


 쾌진격을 거듭하는 오오토모군 앞에 노도와 같이 모리군은 공격해 나옴과 동시에 해상의 수군의 군사들도 상륙해, 섬에 가까워진 오오토모군을 협격합니다. 묘진의 격전(明神尾の激戦)으로 불리는 이 전투이후로 전황은 단번에 모리에게 기울어 결국 승리하고 오오토모군은 군세를 물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