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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복수 시도, 히토토리바시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 마사무네 복수 시도, 히토토리바시 전투



 덴쇼 13년(1585년) 11월 17일, 아버지의 애도를 하는 전투로 다테 마사무네와 하타케야마, 사타케, 아시나의 연합군이  세토가와(瀬戸川)에 가설된 히토토리바시(다리)에서 펼친 싸움 '히토토리바시 전투(人取橋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슈의 패왕이 되는, 외눈의 영웅 다테 마사무네는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한쪽 눈을 실명한 뒤에, 모친에게 버림 받아(요시히메) 위기에 빠졌었습니다. 명승 코사이 소우이쯔(虎哉宗乙)에게 도움을 받아 버틴 그는 15세에 첫 출진을 해, 다테의 옛 영토를 되찾습니다. 이때, 기나이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할복 해(혼노지의 변), 아케치 미쓰히데를 하시바 히데요시가 토벌한 야마자키의 전투(야마자키 전투)가 있었을 무렵입니다. 이때 남부 오슈는 군웅할거의 상태였습니다.



15세에 첫 출진을 한 마사무네



  마사무네는 미하루성(三春城)의 성주인 타무라 키요아키(田村清顕)의 공주 아이히메(愛姫)와 결혼을 했습니다만, 타무라와는 연결이 있었지만, 이사카와군의 이시카와나, 히타치의 사타케는 다테와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덴쇼 12년 (1584년)에 토호쿠의 화목을 맺어 일단 평화가 찾아오고, 이즈음 아버지 테루무네를 이어 마사무네가 다테의 당주가 됩니다. 토호쿠의 옆에 있는 관동에 호조가 세력을 자랑해 아직 히데요시의 손길도 미치지 않았기에 이곳은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토호쿠의 무장들이 노리는 것은 센도(仙道)의 재패였습니다.


 센도란, 센다이(仙台), 시노부(信夫), 아다치(安達), 아즈미(安積), 이와세(岩瀬), 시라카와(白河)를 연결하는 토호쿠 지역을 종단 하는 길입니다. 전국시대에, '교토를 지배하는 사람이 천하를 지배한다'라고 한 것처럼, 토호쿠에는 '센도를 지배하는 사람이 토호쿠를 지배한다.'라고 했습니다. 센도는 토호쿠의 무사가 관동으로 향하는 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토와 이어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덴쇼(연호) 13년(1585년), 다테 가문의 코하마성(小浜城)의 성주 오오우치 사다쓰나(大内定綱)가 아이즈의 아시나 가문게로 배신한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혈기왕성했던 청년 마사무네가 이것을 보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곧 바로 군사를 일으켜 사다쓰나가 농성하는 오데모리성(小手森城)에 쳐들어갑니다. 사다쓰나의 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아시나군을 차례차례로 격파하는 다테의 군세에 사다쓰나는 은밀히 오데모리성을 탈출해, 하타케야마 요시쓰구의 니혼마츠성(二本松城)으로 도망칩니다.


 하지만 다테 마사무네의 기세에 겁먹은 요시쓰구는 적남 고쿠오마루(国王丸)를 인질로 보내고 영지의 대부분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화목을 신청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틀 뒤 테루무네를 방문한 요시쓰구는 테루무네를 납치해 버리고, 이를 뒤쫓은 다테는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아버지와 요시쓰구의 사람들에게 총을 쏴 버리고 맙니다.(테루무네 납치사건) 그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하타케야마를 토벌하려 군세를 일으킵니다. 여기에 아까 인질이 되었고 이제 당주가 되야 하는 고쿠오마루를 중심으로 반 다테세력이 결집합니다.



히토토리바시 전투 전황도



 오오우치 사다쓰나는 물론,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 이와시로 쓰네타카(岩城常隆), 이시카와 아키미츠(石川昭光), 시라카와 요시치카(白河義親) 등이 모인 반다테파 총동원의 연합군의 군세는 무려 3만이나 되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사무네의 군세는 불과 4천이었지요. 덴쇼 13년(1585년) 11월 17일, 양군은 세토가와 주변의 히토토리바시 부근에서 부딪칩니다. 이 전투 예상대로 격전이 되었습니다. 마사무네의 노신 오니와 사게쯔(鬼庭左月)가 전사하고, 다테 시게자네(伊達成美)도 측근인 가타쿠라 카게츠나 (片倉景綱)도 한때, 곤경에 처합니다. 그러나 터무니 없는 병력의 차이에 비해, 일진일퇴의 공방이 반복됩니다.


 이 때, 다테군이 세토가와를 건너는 히토토리바시(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적병을 한 명씩 매복해 토벌했다고 해서 이 다리가 후에 '히토토리바시'라 부릅니다. 이윽고, 날은 저물었습니다. 마사무네는 야습을 경계하면서 야영을 해 내일의 격전에 대비합니다. 그런데, 이 때 적의 주력이었던 사타케의 군세가 급작스레 철퇴를 시작했습니다. 실은 이 출병      동안에 빈 본거지 히타치에, 미토성(水戸城) 성주 에도 시게미치(江戸重道)가 습격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력이 철퇴해 사기가 내리는 연합군에 설상가상으로, 안보의 사토미군이 난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기 시작합니다. 전의를 잃은 연합군은, 이시카와, 아시나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전장을 떠나, 전투는 어중간한 형태로 막을 내렸습니다.



분전한 마사무네



 이 이후 혈기에 맡긴 단순한 공격이 별로 효과가 없음을 깨달은 마사무네는 이 이후로 지략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눈에 띄는 군사행동은 곧 적의 결집이 된다는 일을 깨달은 것이지요. 호조에게 사타케를 견제하게 하거나 하는 등 그는 지략면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