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요시히사 배수의 진 타카성,네지로자카 전투
덴쇼 15년(1587년) 4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의 마지막 전투인 타카성, 네지로자카 전투(根白坂の戦い)가 있었습니다.
덴쇼 13년(1585년)의 3월~4월에는 기슈(기슈정벌)를, 6월~7월에는 시코쿠(쵸쇼카베 모토치카, 히데요시에 항복)를 평정 해, 순조롭게 천하 통일에의 길을 걷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지만 아직 큐슈에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전 해의 오키타와테 전투의 류조지를 물리친(다테나와테 전투) 사츠마의 시마즈가가 큐슈 전 국토를 손에 넣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드디어 그는 큐슈로 향합니다.
하시만 센고쿠 히데히사가 이끌던 시마즈 정벌군은 토츠키가와에서 대패하고 맙니다.(토츠기가와 전투) 그 다음달에 태정관의 자리에 올라 도요토미성을 하사 받은 히데요시는(태정관에 오르다) 본격적으로 큐슈정벌에 나섭니다.
우선 군세를 두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스스로가 인솔해 히고에서 사츠마로 향하고, 다른 한 부대는 남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가 인솔해, 분고, 휴우가를 통해 오스미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이 대부대에 시마즈는 직접 싸우는 것은 하책이라 생각해 큐슈 북부를 포기하고, 휴우가와 사츠마를 지키려 합니다. 그 최전선에서 막는 방파제의 역할한 것이, 휴우가 타카성의 성주 야마다 아리노부(山田有信)입니다. 바로 미미가와 전투의 전장이 되었던 그 성이지요.(미미가와 전투)
그런 운명의 장소를 공격하는 것은, 분고로부터 휴우가로 남하해온 히데나가가 인솔하는 8만의 군세는 수에 의지해 타카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 수의 차이가 많음으로서는 꽤 잘 지킨 아리노부이지만, 지나치게 큰 병력의 차이를 이기지 못한 데다가, 자금의 보급로도 끊어져 머지 않아 함락 직전이 됩니다. 물론, 시마즈도 입다물고 보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타카성의 구원으로 향하는 시마즈의 군세 하지만, 시마즈가 타카성의 구원으로 향할 때에,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네지로자카에는 이미 도요토미 부하인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도요토미 군은 타카성를 둘러싸듯이, 51개에 달하는 츠케시로(付城: 공격용의 임시 성채)를 구축해, 이미 완전한 포위망을 쌓아 올리고 있었습니다. 수에 뒤떨어지는 시마즈가 이 포위망을 찢으려면 , 기습 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덴쇼 15년 (1587년) 4월 17일, 시마즈 요시히로(요시히사의 남동생)이 인솔하는 한 부대가 네지로자카에 포진 하는 도요토미세에 야습을 했습니다.
네고로지카
하지만 도요토미군이 설치한 것은 포위망 만이 아니고, 정보망도 있었습니다. 이 요시히로의 기습은, 사전에 도요토미가 알고 있어, 오히려, 만단의 준비를 마친 도요토미군에 시마즈군이 돌입하는 형태가 되어 버린 기습이었습니다. 시마즈는 엄청난 타격을 입지요. 이 때, 당황하는 시마즈에 대해, 도요토미군이 얼마나 냉정하고 여유가 있었는지 「칸시세이후(菅氏世譜)」라고 하는 문서에 적혀 있습니다.
전투가 끝나가는 무렵, 도망치는 시마즈의 아시가루를 발견한 쿠로다군의 한 부대는, 그 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만, 칸 마사토시(菅正利)가 '저것은 아군이다! 죽이지 말아라!'라고 외쳐, 추격을 그만두었고 그 아시가루도 그대로 자취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고 나자 그 아시가루가 적이었던 것이 판별났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마사토시를 욕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시가루를 죽이는 것이 제일 확실하긴하지만, 아시가루와 같이 신분이 낮은 사람을 죽였봐야 전황이 바뀌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이상 몰아넣어 만약 궁지에 몰린 쥐가 무는 기세로, 그 아시가루가 향해 오면 그 총으로 여러명이 총격당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가. 적 1명을 잡기 위해 아군 몇 사람이 부상을 입는 것은 어불성설이기에 멈췄다.'
결국, 이 타카기 네고로지카 전투로, 이미 저항하기 어려운 일을 깨달은 총대장 시마즈 요시히사는 사츠마로 돌아와, 타이헤이지(泰平寺)에서 삭발해, 히데요시에 항복의 신청을 합니다. 한편, 아리노부는 원군의 패퇴에도 아랑곳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 요시히사의 항복을 알고 나서야 문을 열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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