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히데요시, 크리스트교를 금지하다
덴쇼 15년(1587년) 6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리시탄 금지령(切支丹禁止令)'을 반포했습니다.
처음은 기리시탄(크리스천)에 대해 관대했던 히데요시가, 왜, 갑자기 표변해 기리시탄을 금지했을까요? 덴쇼 15년 5월에, 큐슈 정벌에 출진해 시마즈를 항복시킨 히데요시가(큐슈정벌) 마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와 같이 되어 있는 큐슈의 현상을 눈앞으로 했기 때문에가 아닐까요? 당시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무력 행사를 통해 '일본 점령 계획' 비슷한 것이 있기도 했지요. 그래도 이 태도 변화는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리스탄 금지령
바로 전날 히데요시는 영주와 그 가신에 대해서는 남만신교(크리스트교)를 금지하고 있습니다만, 일반인에 대해서는 '본인의 마음 대로'하라고 해, 그만큼 엄격하게 금지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9일의 문서에서는, 제 일조로 일본은 '신국'이라는 일을 강조해, 제 2조로 영주나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도 신도가 되는 일을 금지하고, 제 3조에서는 선교사는 20일 이내의 국외로 떠날 것을 명령하고 있었습니다. 방금전 썼듯이, 히데요시가 큐슈의 영웅 시마즈를 항복시킨 것이, 이 해의 5월 입니다. 그 때에, 크리스트교 일색이 되어 있는 큐슈를 눈 앞으로 하고, 금지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이 18일과 19일의 태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일본 예수회의 부 관할구역장이었던 선교사 가르파스 코엘료입니다. 그는 1년전 봄에, 오사카성을 방문해, 히데요시를 알현했습니다. 그 때의 히데요시는 기분이 좋았기에 코엘료에 상당히 아첨을 하고, 코에리요도 그런 히데요시의 태도에 기뻐해, 회견은 시종 부드러운 무드로 행해졌습니다. 이 아첨이 바로 '머잖아 나는 명이나 조선을 정벌할 것이다. 이 때 대륙에 포교의 자유를 약속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코엘료는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지원하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이때는 영국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두 척의 배를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이를 뜯어 기술을 습득해 양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코엘료가 제공한 후스타선
하지만 이 전날 6월 18일 히데요시에게 도착한 코엘료가 내민 것은 전투선이 아닌 소형 선박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히데요시는 보복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크리스트교는 제국주의의 야욕으로 뭉친 종교였습니다. 먼저 선교사들이 들어가 평등과 사랑을 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혼란을 틈타 나라를 집어삼킨뒤 노예화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지도자가 되고 큐슈의 실상을 보고 나서야 그 위험성을 알아챈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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